이름은 없는 데서 나오는 동시에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언어다. 또한 이름은 스스로 있게 만든 그것이 마침내 자립적인-표면상 그렇게 보일 뿐이지만-실체가 되어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 슬그머니 물러나는 언어다. 그렇게 이름은 생활세계의 환한 태양이 만드는 극소의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름은 죽음이라는 궁극의 확실성에 의해 영구히 지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진 이름,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의 이름, 즉 칸니트페르스탄은 이름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희한한 이 사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드는 불가해는 아니다.
--- 「1장 언어 외과의사의 편지」 중에서
모든 책=세계-내-존재는 늙어가지만, 물건으로서 책의 나이는 만들어지는 순간 곧바로 영구히 고정된다. 다시 말해, 책은 늙어가지 못한다. 책의 시간은 찰나 아니면 영원 둘 중 하나다. 찰나의 책이 젊고 단순하며 바쁜 독자에게 결코 마르지 않는 획일적인 매력을 뽐낼 수 있다면, 영원의 책은 처음부터 뒤처진 독자, 복잡하게 비참한 독자, 바쁘지 않지만 끊임없이 조급한 독자를 엄중하게 심문하고 지루하게 문책할 수 있다. 모든 늙어가는 독자는 생의 어느 고비에서든 영원의 책의 소환을 받는다. 물론 그 소환에 그가 실제로 응할지, 아니면 거부하거나 회피할지 여부는 기본적으로 그의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다.
--- 「3장 독자 저격」 중에서
이론은 파산하려고 태어난다. 이론의 운명은 파산이다. 표면상 지속하는 듯 보이는 순간에도 실제로 이론은 파산선고의 지배에 예속되어 있다. 이론의 본령에 대해 궁리하는 자에게 파산의 책임을 돌리는 일은 분명 부당하지만, 이는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또한 어쨌든 이론의 운명이 제정한 법에 따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파산한 이론-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군더더기 표현이다-의 세계에서는 오직 제때 제 몫을 챙기지 못한 자만이 책임을 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개 그 책임을 가장 무겁게 느끼는 이들이 하는 일은 (다시)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4장 이론과 무한의식」 중에서
현세의 저자가 독자를 상대로 글이나 책을 쓴다면, 영혼의 저자는 말 그대로 ‘세계를 쓴다.’ 그것은 싸움의 기록이다. 여기서 혹자는 ‘역사’라는 단어 혹은 이념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만약 그 역사를 어떤 단위 혹은 실체로 간주한다면 그릇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엄밀히 따지자면 완전히 끝에 다다르지 않은 역사는 (아직) 제대로 된 역사일 수 없으며, 끝에 다다른 이후의 역사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역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계에 역사는 존재한다. 그러나 무한히 다양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건, 과정, 상황으로서만 존재한다. 요컨대 역사는 너무 많거나 아직 없다.
--- 「5장 영혼의 저자」 중에서
문학의 근본과 존재 이유를 묻는 일은 갈수록 희한하고 볼썽사나운 짓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작금에 문학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거의 모든 ‘행사’는, 설령 그 이름을 상실하거나 박탈당한다 해도 하등 아쉬울 게 없다고 큰소리치는 뻣뻣한 제스처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는 듯 보인다. 게다가 이른바 문학의 ‘대행자’는 수틀리면 언제라도 직접 그 ‘간판’을 떼어버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입버릇처럼 문학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고백한다. 놀랍고 기이한 풍경이다.
--- 「6장 문학과 결의론의 미래」 중에서
우리는 단지 가까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극단적으로 불확실하다. 이 두려운 불확실성을 오롯이 껴안은 채, 탐구주의자는 읽고 쓰고 또 읽는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 자신을 믿지 않는다. 또한 그는 구원을 믿지 못하는 자신을 구해줄 수단을 눈앞에 두고, 가없이 주저한다. 그것이 정녕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탐구주의자는 존재의 모든 차원과 국면에서 무한하고 무정형한 속박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주체’와 ‘인간’에 대해?다른 무엇에 대해서도?함부로 떠들지 않는다. 탐구주의자는 반反현대의 반半지성이다.
--- 「8장 궁지에서 궁진하기」 중에서
잠시나마 혹은 간헐적으로 대학을 상아탑으로서 존립하게 해주었던 ‘마지막 불씨’를 나는 ‘문헌학Philologie’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려 한다. 바꿔 말하자면 상아탑의 존재 이유는 (1차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문헌학에서 찾을 수 있고 찾아(져)야 한다.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듯, 여기서 도입된 문헌학의 개념은 고문서나 희귀 문헌 혹은 고전 작품을 수집-편집-주해하는 일련의 고루한 실천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물론 그러한 실천은 그것대로 지속되어야 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 개념을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즉 해당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을 보자면, 문헌학Philologie은 ‘로고스logos에 대한 사랑philia’을 가리킨다.
--- 「10장 문헌학의 파레시아」 중에서
숄렘의 관점에 따르면, 유대교의 계시 전통으로부터 아무리 멀어진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유대인의 역사를 기억하고 또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안식일의 유대인”이 될 자격이 주어진다. […] 이와 달리 벤야민의 눈에 비친 현대 유대인은 기독교인이나 무신론자와 하등 다를 바 없이 계시로부터 가뭇없이 소외된 존재다.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그에게는 시나이산과 올림포스와 파트모스 모두가 베를린이나 파리 혹은 모스크바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벤야민은 하가다의 자리에 모든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동화를 등장시킨다.
--- 「12장 두 명의 독일인과 세 명의 유대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