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인도’를 뜻하는 토라에 법률적 의미를 덧입혀 이해하게 된 것은 기독교가 그리스-로마의 문화적 렌즈를 거쳐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칠십인역 성경(Septuagint)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토라의 번역어로 ‘ν?μο?’(노모스)를 채택했습니다. 이는 법을 뜻하는 말로, 글로 쓰인 성문법과 불문율로서의 관습법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그리스의 뒤를 이어 세계를 지배하게 된 로마는 특히나 문화적으로 간결하고 명확한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규칙을 법률 조항으로 정교하게 정리하고 체계화했습니다. 신약 시대는 이러한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고대 이스라엘의 히브리적 문화가 충돌하는 배경 속에서 펼쳐지게 됩니다. ‘가르침’과 ‘인도’라는 고대 이스라엘의 포괄적이면서 ‘두루뭉술한’ 개념의 토라가 신약 시대에 와서 ‘법’이나 ‘율법’으로 이해된 것은 이러한 문화적 굴절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외에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표현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너무 흔하고 익숙한 표현이어서 아무런 신비감을 주지 못하는 신명(神名)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15)이라는 표현입니다. 피조세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의 이름을 앞세워 자신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 혹은 “나는 곧 나다”라는 멋진 표현 뒤에 나오기에는 많이 빈약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창세기가 증언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이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다면 좀 이해가 될 듯도 한데, 이들 ‘믿음의 조상들’은 사실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아내를 팔아넘기거나 타인을 속여서 이득을 취했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야곱은 그야말로 겁쟁이였습니다. 딸의 복수를 하고 돌아온 아들들에게 ‘너희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다’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창 34:30). 그는 말년까지도 자신의 배고픔과 자신의 목숨이 더 우선인 사람이었습니다(창 43:2, 12-14). 그런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이 이렇게도 부족한 사람들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두고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자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덧붙이십니다.
붉은색 땅을 일컫는 단어 역시 같은 어근에서 유래한 ‘아다마’입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가리키는 ‘에레츠’와 달리 아다마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을 가리킵니다. 고대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에게 토양은 크게 두 가지, 곧 희고 옅은 땅과 붉은 땅으로 나뉩니다. 이 두 토양의 가장 큰 차이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지요. 옅은 색 토양은 식물이 자라기 어려운 사막인 데 반해 붉은색 땅은 옥토입니다. 앞의 두 사진을 비교해 보면, 아래쪽 사진의 토양이 확연하게 붉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진 모두 이스라엘 남부의 팀나 계곡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두 가지 색깔의 토양이 공존하는 곳이지요.
이런 붉은 토양은 사막과는 달리 비옥해서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땅(아다마)이 붉게 물든 이유를 옅은 토양이 ‘피’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 듯싶습니다.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에 피를 머금은 땅이 생명을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더욱 확장되어 남보다 더 붉은 피부를 가진 이들은 강인하고 뛰어난 사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윗(삼상 16:12, 17:42)과 에서(창 25:25)의 붉은 피부를 묘사할 때 쓰인 단어가 바로 ‘아드모니’입니다.
--- 「1장 ‘히브리어에 반영된 하나님 이해’」 중에서
아가 1:5에 대한 해석은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African-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이 일어나며 점차 변하기 시작합니다. 흑인신학자들은 “검으나 아름다우니”(black but beautiful)라는 해석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대체 왜 검은 것은 아름답지 않은가? 이러한 영향으로 새로운 번역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1989년에 나온 NRSV가 “I am black and beautiful”로 개정하였고, 2000년 출간된 ISV도 동일하게 번역했습니다. 또한 직역을 추구하는 NASB도 2020년에 개정판을 내면서 “I am black but lovely”라는 기존의 번역을 NRSV, ISV와 같은 표현으로 수정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 나온 CEB 역시도 아가서의 표현을 “Dark I am, and lovely”로 번역하게 됩니다. 한글 성경 중에서는 새번역이 이 본문을 “내가 검어서 예쁘단다”로 번역하며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번역은 단순히 ‘검다, 그리고 아름답다’(black and beautiful)를 넘어 ‘나는 검다, 그래서 아름답다’(I am black, therefore, beautiful)라는 한발 더 나아간 해석을 채택함으로써 “나는 검기 때문에 아름답다”라는 흑인신학자들의 해석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습니다.
나비를 ‘미래를 예언하는 자’로 볼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성경의 예언서 혹은 선지서를 어떠한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대표적인 예언서인 이사야서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사야서를 ‘미래’에 초점을 두고 읽는다면,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하는 책으로 볼 수 있고 이사야서의 구절 중 극히 일부만이 이러한 맥락에 해당됩니다.
이사야서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동안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 서 있었는지를 지적하는 ‘과거’의 이야기와, 지금 그 행실을 하나님 앞에서 바로잡으라는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와 따르지 않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를 선포하는 ‘미래’의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 「2장 ‘히브리어에 반영된 인간 이해’」 중에서
히브리어의 복이 다른 언어문화의 복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축복을 하는 사람의 행위 (‘좋은 말을 하다’ 혹은 ‘피를 뿌리다’)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복을 받는 사람의 자세를 묘사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흥미롭게도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우리의 자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있는가가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의 바라크를 한자로 옮기자면, ‘복 복’(福)보다는 ‘엎드릴 복’(伏)에 더 가깝습니다.
--- 「3장 ‘언어 표현에 나타난 히브리적 사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