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자신의 벽에 깃든 모든 역사를 기억한다. 안에 살던 사람은 죽어도 집은 남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 집의 일부로 영원히 귀속된다. 먼저 무너뜨리지 않는 한 집은 누군가의 삶을 담으며 존재한다. --- p.10
입동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나는 10년 만에 붉은담장집의 내부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후 수십 년을, 수 세대를 거슬러 존재할 망령을 조우한다. 가네모토 유타카. 가엽고 끔찍한 망령의 이름이다. --- pp.50~51
소년은 한마디로, 불길했다. 무덤가를 배회하는 까마귀, 혹은 이미 죽은 몸에 악령이 깃들어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가끔 수영장에 동동 떠 있을 때면 썩은 연못에 배를 드러내고 뜬 물고기 같기도 했다. 소년의 기행과 잔인함은 종종 도를 넘었고, 나는 신자도 아니면서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바쳤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pp.88~89
내 안에 남은 건 이제 익숙한 고통과, 아직 벌어지지 않은 모든 장면과…… 때를 기다리는 마음뿐이야. --- p.123
나에게 필요한 건 보살핌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 p.170
외증조모가 죽던 날의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빛바랜 필름처럼 스치는 꿈의 장면들, 피와 고통의 지하실. 진실로 향하는 원형의 문이 매끄럽게 펼쳐졌다. 퀭한 눈으로 내가 귀를 가져다 댔던 바닥을 살폈다. 외증조모가 쓴 소설 안의 어리석은 주인공들처럼. --- p.171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건지가 압도적이고 분명하게, 내 안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너무나 선명히 보이는 파편을 쫓아 손을 뻗었고, 화마에 집어삼켜진 지붕이 내 시야를 덮치는 걸 마지막으로 어둠에 잠겼다.
밤새 강풍이 휘몰아친 10월의 어느 새벽, 외증조모는 저 밑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들으려는 듯, 바닥에 한쪽 귀를 댄 기이한 자세로 50년 이상 살아온 적산가옥 별채에서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20대 이후 일본에서 지내온 나는 그곳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외증조모의 유언대로 그 집에 살러 들어오는 것으로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곤 마주친 적산가옥의 유령, 가네모토 유타카. 이 가엾고 끔찍한 망령과 조우한 뒤 나는 꿈속에서 외증조모가 되어 오랜 시간 피와 비명을, 비밀과 불을 머금고 살아온 이 집의 별채에 숨겨진 비밀을 마주한다. 깊은 밤, 유타카는 나에게 마음속에 품어온 말을 속삭인다. “아버지는 내가 죽일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외증조모와 증손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방심한 사이에 마주친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그저 문장으로 읽고 흘려버리고 싶어도 머리는 저절로 소설에서 나온 것보다 더 자세하고 선명하게 영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붉은 소파와 방바닥에 펼쳐진 물고기의 배와 날카로운 상처들이 뒤죽박죽되어 눈을 감게 된다. 그럼에도 눈을 떠서 보고 싶다. 계속 읽고 싶다. 일제강점기 시절 적산가옥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지금의 적산가옥에서 벌어지는 일은 무엇인지 궁금해서 눈을 뜨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