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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작가의 말 5
1 전씨가의 사람들 11 2 동해랑의 낙조 104 3 묵은 것과 새로운 것 258 |
朴婉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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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태임이가 이 나라 여자들과는 다르게 살길 바랐다. 이 나라 여자들이 빈부, 귀천에 상관없이 공통으로 쓰고 있는 숙명적인 굴레에서 태임이만은 풀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여자들이 살아온 것과 다른 삶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그런 삶을 예비해야 되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미구에 여자들의 삶도 달라지게 되리란 막연한 예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라 안팎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풍운이 다만 왕의 성이 바뀌는 역성혁명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과도 상통하는 그만의 현실감각이었다.
---p.34 “그 사람은 당장 숨이 넘어갈지도 모를 만큼 위중한 것 같았어요. 그런 중에도 헛소리를 지르는 게 밖에까지 들렸어요. 그 도적놈들은 왜놈들이었다고 나막신 신은 걸 똑똑히 보았노라고 외치더군요. 그대로 죽게 할 순 없었어요. 누군가가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으면 그는 아마 죽어서도 눈을 못 감고 원귀가 되어 떠돌아다닐 것 같았어요. 그때 그에게 필요한 건 약이나 침보다 그의 말을 참말로 믿어 주는 사람이었어요. 전 들어가서 그에게 다짐했어요. 그의 말을 믿는다고, 그가 죽어도 내가 그 말을 증거하겠노라고요. 그게 뭐가 나빠요, 할아버지.” ---p.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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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분단에 이르기까지
박완서가 채집하고 체화한 한반도의 이야기 『미망』은 박완서 작가의 소망이기도 했다. 초판 작가의 말에서 박완서는 이제는 가지 못하는 고향 개성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며 이렇게 쓴다. “내가 만들어 낸 인물들만이라도 그 그리운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며 운명과 싸워 흥하고 망하고 울고 웃게 하고 싶다는 건 내 오랜 작가적 소망이자 내 나름의 귀향의 방법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소설에는 고향에 대한 작가의 커다란 애정을 보여 주는 개성 사람의 특질과 그 고장만의 상업과 사업가들의 방식, 특히 개성 지방의 물과 흙으로 키워 낸 인삼 농사에 대한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렇듯 『미망』은 이제는 가지 못하는 고향을 되살리는 동시에 한 집안의 일대기를 통해 한반도의 역사를 보여 주는 소설이다. 소설에는 대한민국 이전의 조선, 그 이전의 고려 시절부터 맥을 이어 온 역사와 경제, 그리고 구시대의 가족과 그로부터 뻗어 나가 변해 가는 아들딸들의 시대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역사의 큰 줄기를 관통해 가는 와중에 박완서 작가 특유의 여성주의적 관점에 더해 인물에 대한 냉철하고 가식 없는 평가, 욕망에 대한 가차 없는 판단이 빛을 발하는 부분들이 넘쳐난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집필했음에도, 『미망』 속 박완서의 문장에는 결연하고 전진하는 듯한 힘이 서려 있다. 시대의 바람에 속절없이 나부꼈던 잎새 같은 사람들이 남긴 잊을 수 없는 눈빛 『미망』의 주요 등장인물은 신분제가 들썩이던 시절 비범한 상업 감각으로 인삼 농사와 장사를 통해 집안의 부를 축적한 전처만 영감과, 그가 유난히 애틋하게 아끼는 손녀 태임, 그리고 태임의 남편이 되는 쇠락한 양반 가문 출신 종상, 태임의 어머니가 친정의 하인과 간음하여 낳은 태임의 이부 동생 태남, 이후 시간이 흘러 태임과 종상이 결혼하여 낳은 딸 여란으로, 이외에도 이 가문을 중심으로 4대에 걸친 인물들이 혼란한 역사 속에서 각자의 신념과 욕망을 찾아 헤매며, 그 와중에 서로 반목하고 연민하거나 경쟁하고 동지가 된다. 소설의 제목 ‘미망(未忘)’의 뜻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음’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는 종종 제목의 동음이의어인 ‘미망(迷妄)’, 즉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상태’가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물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시기에 닥쳐오는 혼란과 변화를 구시대(조선)보다 자유롭게 느끼며 폭발하는 개인적 욕망을 마주하면서도, 나라의 흥망 앞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같은 ‘떳떳한 것’에 대해 거듭 고민한다는 점에서 그 단어는 운명 앞에서 헤매는 인물들의 마음을 절실하게 나타낸다. 작가가 끝까지 밀고 나간 이 세밀하면서도 우직한 소설을 그때보다 먼 훗날의, 지금의 독자들이 함께 체험하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