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삼위일체는 존재의 지고한 신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거가 되기에, 삼위일체 없이 해명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이것이 삼위일체가 신비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고, 어느 정도까지는 논리가 있는 이유다. 달리 말해, 삼위일체는 모든 존재의 깊이임과 동시에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로서 참된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형이상학에 관해 말하는 철학자들도 존재의 근원을 다루기는 하지만,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철학자들에게 형이상학의 실재는 진화 법칙의 지배를 받는 본질essence, 혹은 만물을 흘려내보내는 일련의 발산물emanation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이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은 논리의 취약함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한 면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논의는 일반 형이상학보다 논리의 측면에서 우위를 점한다.
특별히 삼위일체 하느님이 실존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리스도교 고백에 따르면 우리 실존의 근간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 삼위일체는 태초 이전부터 있던 사랑이며, 사랑의 확장을 추구한다. 사랑 외에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랑은 끝이 없고, 영원하다.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끝이 없기에, 시작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는 사랑은 우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창조되지 않고, 끝이 없는 법칙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 법칙에 종속된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은 우리에게 어떤 빛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 p.13~14
우리는 원인이 있는 존재, 즉 알 수 있는 존재를 통해 원인이 없는 존재, 미지의 존재, 스스로 있는 존재, 즉 하느님을 안다. 이는 신학 방법론에서 부정apophatic의 길과 긍정cataphatic의 길이 서로 소통함을 방증한다. 부정의 길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는 긍정의 길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를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으며, 긍정의 길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는 부정의 길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를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부정의 길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를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은 긍정의 길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 역시 온전히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긍정의 길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는 절대로 완전히 알 수 없는 존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p.18~19
선, 즉 하느님의 사랑은 가장 견고한 생명(삶)의 형태고, 하느님의 고유한 실존 양식인 전능은 만물의 진보를 허용하며, 진보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잃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앎은 선을 섬긴다. 하느님의 존재(즉, 그분의 선하고 복된 생명), 힘, 앎은 약화되거나 제약받지 않는다.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 안에서만 이 요소들은 약해질 수 있다. 이는 선물이며, 피조물들은 이 선물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받아들이면, 피조물들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 성장한다.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피조물들의 창조 행위는 일그러진다. 이때 힘은 자기중심주의를 섬기고, 자기중심주의는 자신의 힘을 늘리기 위해 논증과 정직하지 않은 판단을 활용한다.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피조물은 자신이 무한히 살 수 있다는, 모든 걸 알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에 갇힌다.
--- p.44
몸이 타격을 입거나 상처를 입을 때 영혼 역시 고통(혹은 쾌감)을 느끼거나, 연인이 서로의 몸을 매만질 때, 맛 좋은 음식을 먹을 때, 몸이 휴식을 취할 때 영혼 역시 쾌감을 느낀다는 사실에서도 위대하고 경이로운 신비를 발견할 수 있다. 육신, 물질의 몸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들께서도 고통과 아픔을 느끼셨다. 이는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못이 박혔을 때 절정에 달했다. 그리스도께서 고통받으실 때 그분의 고유한 위격은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견해는 사실이 아니다.
그분은 진실로 고통받으셨고, 부활의 몸 안에서 투명한 기쁨을 느끼시며 물질로 이루어진 몸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하느님의 선은 자비를 포함하며 자비는 감정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식이 고통받을 때 어머니의 영혼이 고통스러워하듯 하느님도 인간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신다. 그분의 아들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서 인류를 죄에서 해방하기 위해, 인류를 대신해 자신을 희생하셨다. 이때 그분은 자신의 고통을 ‘아버지’께서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방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인간 안에서 성령이 하는 활동, 성령을 통해 승천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활동에 별달리 주목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와 성령은 단절되었다. 서방 교회는 그리스도를 거룩한 신비에 깃든 창조되지 않은 은총, 혹은 창조되지 않았으며, 성화하고, 변혁하는 하느님의 힘을 인간과 연합시켜 신자들을 새로운 영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분으로 긍정하기보다는 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말, 그리스도의 활동에만 주목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부활시켜 모든 피조물과 함께 빛을 발하는 몸으로 만드시는,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성령의 생명을 주신다고, 거룩하게 하신다고, 그렇게 성령과 함께 활동하신다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한 교회는 정교회뿐이다. 정교회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인간은 그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최상의 공로로 인해 용서받는, 그리스도의 희생, 그리고 그 효력을 믿음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깨끗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정교회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거룩한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미래에 그리스도를 닮은 변모된 몸이 될 때까지 성화는 계속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정교회는 하느님께서 몸소 변모와 성화를 위한 매개가 되셨으며 이를 위해 인성을 지니고 계신다고 믿는다.
--- p.117~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