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에 지워진 과제는 바울의 그리스도 경험이 정확히 그 자체로 하나님 경험이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내용을 가능한 온전하고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신학 언어를 발명하거나 빌려 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곧 하나님을 닮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었다.
최소한으로 말해 이 사실은 바울에게 ‘십자가화’(cruciformity), 즉 십자가에 못 박힌(crucified) 그리스도와의 동화(同化, conformity)는 정말로 ‘하나님화’(theoformity), 혹은 테오시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들에 관한 본서의 논의는 또한 바울의 유명한 표현인 ‘그리스도 안에’가 바울에게는 ‘하나님 안에/그리스도 안에/성령 안에’의 줄임말이었다고 제안할 것이다. 즉,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성은 사실 암시적인 삼위일체론이었다.
--- 「서론│십자가 형태 하나님 안에 살다」 중에서
빌립보서 2:6-11 연구에서 해소되지 않는 끈질긴 질문 중 하나는 이 본문의 배경(들)과 출처를 둘러싼 문제다. 그런데 우리가 빌립보서 2:6-11에 접근할 때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본문이 시적 내러티브라는 사실이다. 대부분 시와 마찬가지로 이 본문도 풍부한 은유와 암시를 담고 있으며, 그렇기에 출처 혹은 심지어 ‘배경들’보다는 상호텍스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마도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적절한 역사적·문헌학적 정밀성을 추구하긴 해야겠지만, 또한 상호텍스트적 씨줄과 날줄로 직조된 이 작품 속에 존재하는 의미론적 중첩과 모호함을 그대로 안고 가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 시적 상호텍스트성 개념에는 이러한 본문 안에 서로 창조적 긴장 관계에 있는 단어, 암시, 반향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혼란만 남는다는 의미도 아니고, 시적 내러티브에는 아무런 내적 구조와 일관성, 플롯, 혹은 논리가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료의 출처나 사전학과 관련된 절대적 정확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시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시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본문에서 논란이 되는 단어와 구절 중 다수는 시 내부에서 그 의미를 얻는다. 더욱이 시의 전체 의미는 바울이 이 시를 근접 문맥과 빌립보서의 다른 곳에서, 그리고 우리가 가진 바울서신 전체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 그리고 그럼으로써 해석하는지 조사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적 본문을 체계적인 기독론에 관한 논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 내러티브가 신학적 의미를 전달했고 또한 전달한다는 합리적인 가정을 할 수 있다.
--- 「1장│“그는 하나님의 형태이신데도/형태이시므로”」 중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에게는 두 가지 구원론 모델(법정적 모델과 참여적 모델)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이 있었는데, 그것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에 의한 칭의로서, 그 의미는 언약의 정수를 담은 그리스도의 행위,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보인 그 믿음과 사랑의 행위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 및 이웃과의 올바른 언약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한번의 행위는 율법의 ‘수직적’ 요구와 ‘수평적’ 요구 모두를 성취해서, 그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그와 동일한 생명을 주는 율법 성취를 경험하며, 그 경험 안에서 죽음을 통한 부활이라는 과정, 그 역설적이고 기독론에 기초한 과정을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동화되는 과정(십자가화ㆍ그리스도화)에 첫발을 내딛게 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그것은 곧 하나님화(theoformity) 혹은 신화(deification)의 과정이기도 하다.
넓게는 제2성전기 유대교 문헌에서 혹은 좁게는 바울서신에서 그리스어 동사 ‘디카이오오’(dikaio?) 및 관련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는 ‘칭의’ 개념은 때때로 편협한 ‘어휘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마치 단순하게 그 단어 자체가 등장하는 경우만 분석하면 이 광범위한 신학 개념에 관한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연구되었다. 하지만 유대교의 신학 개념으로서 칭의를 대상으로 삼는 모든 논의는 서로 겹치는 개념인 언약, 생명, 그리고 당연히 정의/의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칭의는 무엇이었는가? 내가 주장할 내용은 바울에게 칭의란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혹은 신학적 관계 및 그와 불가분한 (타인을 향한) ‘수평적’ 혹은 사회적 관계 모두에서 올바른 언약 관계의 수립 혹은 회복을 뜻하며, 바울은 그것을 언급할 때 ‘피스티스’와 ‘아가페’를 가장 빈번하게 사용했고, 또한 거기에는 궁극적인 신원과 영광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포함되며,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에 비추어 이해되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경험된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신자들이 최초에 그리고 계속해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분이 부활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the resurrected crucified Christ)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이 점은 기독론과 구원론 두 측면 모두에서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중요하다. 첫째, 다시 일어나신 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으로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은 단지 은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임재가 신자를 탈바꿈시키고 신자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살아 있는 인격이신 분과의 만남에 관한 적절한 묘사다. “사는 것은 더는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시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삶은 자기 자신을 주심으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함으로 사는 것이라.” 더글러스 캠벨의 말처럼, “이것은 단순히 ‘이미타티오 크리스티’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자들에게]…그리스도를 모방하라기보다는(아마도 이것은 불가능한 과제일 것이다) 그 안에 거주해서 혹은 그 안에 내주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의 모습으로 적극적으로 재형성하게 하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의 충성과 사랑 안에서 알려진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케노시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실을 계속해서 정의하며, 따라서 그분이 생기를 불어넣은 사람들의 현실도 계속해서 정의한다. 둘째, 그렇다면 우리가 1장에서 확인했듯이, 부활하신 분은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다. 케제만의 유명한 말처럼 “십자가는 부활하신 분의 서명이다.” 앞에서 묘사한 바 ‘십자가화로서-현재적-부활’의 역설적 특징을 요구하고 허용하는 것이 바로 이 기독론적 현실이다.
--- 「2장│“믿음으로 의롭게 되다/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다”」 중에서
그렇다면 빌립보서 2:6-11은 순종하는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내러티브적 정체성과 거룩함뿐만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내러티브적 정체성과 거룩함도 드러낸다. 본서 1장에서 강조했듯이, 이것은 반직관적이고 반문화적이며 반제국적인 형태의 신성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를 바울이 원한다는 의미다. 분명히 바울은 그리스도가 행한 일이 반직관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관습을 벗어났음에도, 궁극적으로는 신성의 위반이 아니라 신성의 표현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의 거룩함의 표현이라고 암시한다.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저버린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할’ 수 있겠는가? 본서 1장에서 주장했듯이, 이 말의 의미는 ‘그는 하나님의 형태이신데도’가 사도 바울의 더 넓은 사고 체계에서는 ‘그는 하나님의 형태이시므로’의 뜻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급히 덧붙여야 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화의 구현(예를 들어, 자기희생)이 반드시 성령의 사역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울에게 십자가 형태의 자기희생이 거룩함의 독특한 차원이며 필수 조건인 것은 맞지만, 그것이 거룩함의 전부는 아니다. 특히 앞서 확인했듯이, 바울에게 성적인 거룩함이 없는 십자가화는 결코 거룩함이 아니다. 그것은 사이비 거룩함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희생’의 대가로 금전이나 다른 형태의 보수를 받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기희생의 행위가 아니다.
더욱이 바울은 성적 방종/부도덕이 십자가 형태 실존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그런 모습은 십자가를 통해 사람의 몸을 속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적절하게 적용하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특정한 순종의 형태를 드러내지도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성적 부도덕[그리스어 ‘포르네이아’(porneia)?“동성애 행위와 일반적인 성적 부도덕을 포함하는…‘불법적인 성관계’”]과 십자가 형태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포르네이아’는 기껏해야 자기애의 한 형태이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거룩함을 약화하는 자기 탐닉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 「3장│“내가 십자가 형태이니, 너희도 십자가 형태가 될지어다”」 중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상태?약함, 경건하지 않음, 죄인, 원수?에 관해 그리고 그런 그들과 화해하시려는 하나님의 반응에서 확인되는 순전하고 반직관적인 연민과 은혜에 관해, 이보다 더 냉정한 설명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주도하시며, 자신을 향한 인류의 반역과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적개심에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시지 않고 비범한 은혜로 대응하신다. 보통 인간이 유혹당하는 방식, 즉 원수를 짓밟고 부정한 타자를 제거하는 방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반응이 아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께 화해시키려, 그리고 사람들과 사람들을 화해시키려 먼저 손을 내미신다.
그래서 윌러드 스워틀리(Willard Swartley)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주장을 한다.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평화, 그리고 이전에는 소원했던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이룬다는 개념은 바울의 교리적·윤리적 사상에서 너무나 중심적이어서, 그 핵심에 평화와 화해를 두지 않고는 바울 사상을 충실하게 재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한 은혜에 대한 인간의 적절한 반응은 무엇보다도 단순히 그 은혜를 수용하는 것이다. 아니, 더 바울답게 표현하자면, 그 은혜에 의해 수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서 확장되어, 심지어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도, 신적 질서에 반항하는 사람들에게도 미치기 때문에, 바울에게 사랑의 필연적 결론은 비보복과 비폭력이다.…이것이 바로 신적 사랑과 화해에 관한 바울 복음에 뿌리내린 평화주의다. 이 평화주의는 특히 신자들을 박해할 수도 있는 공동체 외부 사람들을 대할 때 작동하지만(롬 12:14-21), 비보복과 평화 중재가 교회 안에도 필요하다는 사실은 하나님도 아시고, 바울도 안다(살전 5:11-15).
--- 「4장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