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급작스럽게 닥쳐왔다.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찾아오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하루 전에는 형제들 앞에서 “행복한 삶이었어요. 감사합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날은 5월 5일 주일날이었고, 마지막 글을 쓴 지 불과 15일 만이었다.
남편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자신의 처지와 경험을 어떻게든 유용하게 만들려고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가고 병이 깊어질수록 페이스북은 오히려 독자들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얻는 곳으로서의 의미가 더 커졌던 것 같다. 댓글들을 읽으며 그는 종종 고마움의 한숨을 쉬곤 하였다. 특히 마지막 두 달 동안 페이스북은 그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마지막 통로가 되었다.
(중략)
3차 항암 치료가 시작되던 2월 어느 날, 남편은 모처럼 밝은 얼굴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는 현장에 있었어. 낡은 내 몸의 장막이 새로운 장막으로 하나하나 다 재건될 것이라는 환상을 본 거야.”
그가 마지막 날에 가졌던 삶에 대한 애착과 아쉬움이 이토록 간절했나 싶어서 가슴이 아리다. 그런데 그의 새 장막은 어떻게 생겼을까?
발간사 _아내 이선이
“우측 폐 상단에 종괴(
P? 보임, CT 촬영 권고.”
건강보험공단 정기검진 소견서에 쓰인 첫 마디였다. 순간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어두운 그림자. 그러나 나는 “여보, 오른쪽 폐에 무어가 보인대” 하고 아내에게 소리치고, 다음 줄을 읽었다. ‘아무 것도 아닐 거야.’
아내는 컴퓨터 앞에 앉더니 ‘종괴’라는 단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더 놀란 표정과 태도…. 그러나 나는 소견서를 더 훑어보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내일 강의를 준비하려던 참이었다. 당뇨 정기검진 때문에 남들보다 X-ray를 더 많이 찍어 왔지만 그 사진들이 언제나 아무 탈 없음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별 것 아닐 거야.’
아내는 “빨리 알아보라”고 성화를 대었다. 깊은 잠이 들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계속 외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결국 밝혀질 거야. 천천히 알아보지 뭐….’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수업 중에도 께름칙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수업을 중도에 그치고, 학교 근처의 가까운 의원으로 달려가 소견서를 보여 주었다.
“큰 병원으로 가서 사진을 찍어 보시지요.”
한걸음에 학교에서 멀지 않은 큰 병원으로 달려갔다. 간호사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랐다. 다른 내원객들을 제치고 내게 우선권을 주더니 바로 조사를 시작했다. 다시 X-ray 촬영, 다음 날 CT 촬영, 그 다음날 의사 면담. CT 촬영 결과는 길이, 넓이, 높이가 각 4센티미터쯤 되는 둥그런 생체가 우측 폐 상단 한가운데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둥그런 게 그나마 다행이네요. … 수술합시다.”
집 가까운 데 있는 좀 더 큰 병원으로 옮겨서 수술을 받자는 가족들의 의견 때문에 기왕의 사진들과 소견서를 떼어 새 병원에 제출하는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내 병의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방사선과의 진료 소견에는 “임파선이 확장되어 있으며 종괴와 폐 세포 사이에 결합적 모습도 보인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상황이 심각했다
01_부인의 심리
성경과 말씀, 찬송과 기도, 위로가 암 투병을 하는 내게 참으로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만 믿고 신앙으로 이겨라”하는 충고는 참으로 엉뚱한 것이다. “하나님이 더 크게 쓰시려고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이라는 위로와 설명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믿고 기도하면 치유된다”는 언명은 내가 믿음이 없어서 이런 질병에 걸린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신앙과 종교가 내게 힘이 되고 의미가 있는 것은 오히려 이 질병을 통하여 삶을 보다 깊이 있게 보고, 생각하고, 고통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한다는 데에 있다. 아니, 그런 길 자체가 신앙이고 종교이다. 그것은 삶을 ‘방어’하는 진지(
??가 아니라 삶을 ‘탐색’하게 하는 문(?이다. 물론 삶에는 방어하는 벽도 필요하고, 밖으로 나가게 하는 문도 필요하다. 막는 ‘방패’도 필요하고 전진하게 하는 ‘창’도 필요하다. 어느 한쪽만 고집하면 결국은 실패하거나 죽게 되어 있다.
19_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한의사는 나더러 “책을 놓으라”고 하였다. 머리를 써서 몸이 허약하니 책을 끊으란다. 책을 끊는다면 무슨 재미로 사나? 아니 무엇 하러 사나? 폐암에 등산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 종일 등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건강해지면 무엇을 할 것인데?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금 평창에서 열리고 있는 스페셜올림픽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세계의 지적장애인들이 그들을 돕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동계 올림픽 종목 경기를 하고 있다. 그들이 올림픽 경기를 한다고 지적장애가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 장애를 가지고 그 안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면서 운동경기를 하는 것이다.
암을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가? 암을 신체적 장애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그런 장애를 가지고, 책을 읽고, 연구를 하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고,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하고, 설교도 하고, 그리고 강의도 한다. 그것이 행복의 조건, 일상생활의 우위성이 아닐까? 건강에 대하여! 여러 번 거듭 말하거니와 건강을 위한 건강은 없다. 건강은 생활을 위해 있다. 건강에 장애가 있어도 생활은 그 나름으로 보람과 기쁨으로 보낼 수 있다.
37_행복의 조건
암 선고가 떨어졌을 때, 어느 성경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더듬거렸다. 식구들과는 복음서를 읽고 있었지만,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나만을 위한 말씀’을 읽으려 하는데…. 물론 시편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쉽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위로와 희망의 예언서’인 제2이사야서(40장~55장)가 어렵지 않게 정해졌다. 제1이사야서에 끼어 있기는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제2이사야서에 속하는 35장도 자주 되풀이 읽는 장이 되었다. 암이라는 바벨론보다 더 무서울 수 있는 적에게 포로된 나에게 이사야서는 “불꽃을 지나가도 터럭 하나 그슬리지 않을” 그런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욥기를 읽어야지, 내가 바로 욥처럼 그런 정상에 빠져 있잖아 라는 속삭임이 늘 있었다. 그러나 욥기를 읽기에 마음이 부담스럽고 또 기피하는 심정이 자꾸만 솟구쳐 올라와서 그러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방에 들어갔다가 아들 성경이 욥기를 펼쳐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음이 울컥하였다. 아버지가 욥처럼 의인은 못되더라도 고난 받는 것은 비슷하다고,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욥기를 읽고 있구나. 나는 얼른 방을 나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2차 항암이 그리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3차 항암과 더불어 심각한 부작용이 생겨나면서 고통이 심해지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욥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욥에 대하여 선뜻 생각을 정리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성서학적으로도 해석이 힘겹고 이설들이 많은데다가 신학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난제를 포함하고 있는가. 심지어는 심리학에서조차 욥기는 해석상의 ‘미끄러짐’이 심하여 되도록 말을 하지 않으려는 책이 아닌가!
51_욥을 위한 변명(1)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