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미래의 문화 수혜자에게 자칫 선한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베일을 찢어 버림’으로써 ‘자기 보존의 체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 p.9
문학과 사회학은 샴쌍둥이 자매로서 운명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같은 일을 하고 협력할 수밖에 없다.
--- p.34
교사는 내적 모험의 전문가, 시간의 장인, 청춘의 카드 딜러이다.
--- p.55
슈퍼마켓은 우리의 사원이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쇼핑을 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p.62
우리는 문학·영화·노래·그림 등 ‘예술’이라고 부르는 모든 창작물에서 개인적으로 구원을 모색하고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 p.67
현대 사회의 구조는 갈수록 극도로 복잡해지는데, 그 구조는 비어 있는 중심을 향해 끌려가며, 바로 이 비어 있는 중심으로 모든 권력과 가치가 모인다.
--- p.74
서양의 전통은 패자로 간주되는 공정한 아버지보다 세상 사람들에게 승리한 불공정한 아버지를 선호한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역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리어왕』에서 힘과 위신을 잃고 버림받은 아버지의 원형을 창조했다.
--- p.89
요즘은 낯선 것보다 더 익숙한 것은 없고, 비범한 것보다 더 평범한 것은 없다.
--- p.110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 p.117
‘사용자 친화적’이라 쓰고 ‘사용자 순종적’이라고 읽는다.
--- p.132
모호한 것은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 외견상 명확하고 투명한 인간관계의 이면에는 적나라한 야만성이 도사리고 있다.
--- p.140
타인이 프로젝트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단순 도구나 대상으로 인식되고, 평가가 항상 객관적·통제적인 세상에서는, 성공은 진정한 삶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한테만 미소 짓는다.
--- p.143
우리는 ‘업그레이드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업그레이드된 인간은 더 이상 쓰지 않는 기억 용량을 잃어 갈 수밖에 없다.
--- p.162
이제 사회적 지위, 사회적 인정, 사회적 평판의 척도는 소비 패턴이다. 오늘날 우리 삶의 의미와 중요성은 소비로 표현된다.
--- p.171
성공은 자기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남을 앞지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친밀한 인간관계와 사회적 헌신’을 위한 여지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 p.177
나르시시즘은 영혼의 패스트푸드이다. 그것은 당장은 입에 좋을지 몰라도 길게는 부정적이고 때로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데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찾는다.
--- p.178
시도하고 시도하고 또 시도하라. 삶의 기술은 올바르게 시도하는 것보다 시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데 있다.
--- p.195
인터넷은 백만 명의 사람이 백만 개의 마이크를 잡고 다른 누군가의 노래를 각자의 버전으로 부르는 메가 가라오케다. 누구의 노래를 부르는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노래를 한다는 것이다.
--- p.198
이제 자아는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결정을 도덕적 문제로 재생하는 실험실이 아니라, 리텔의 소설에 나오는 파시스트 남성들처럼 아디아포라화의 공장이 되고 있다.
--- p.219
‘우리는 하나’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긴축, 즉 다른 모든 국가에 맞서 자신의 국가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는 흐름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처럼 어제까지 박해의 희생자였던 민족에서도 볼 수 있다.
--- p.230
최상위 학교의 주목적은 지식을 넓히고 모든 학생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힘 있는 부모들의 지위를 물려받게 될 그 자녀들과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다.
--- p.246
오늘날 시인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저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할 뿐이다.
--- p.248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예술을 사회학으로 바꿔도 그대로 성립한다. 기나긴 인생의 끝자락에서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저 질문이다.
--- p.255
근본적인 실존적 문제를 공적 의제로 만드는 것이 문학과 사회학의 공동 소명이다. 그 두 분야는 끊임없이 서로 보완하고 자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 p.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