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눈썹 아래의 눈매는 날카롭게 확 치켜올라가 있고, 높이 솟은 콧날은 베일 듯이 날카로워서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남자의 인상을 무섭게 만들고 있는 것은 왼쪽 뺨에 나 있는 커다란 흉터 자국이었다. 마치 칼로 길게 베인 듯한.
‘이 사람들 진짜로 조폭 맞나 봐!’
은하가 거기까지 생각하는 동안에도 남자는 내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가슴께를 움켜쥐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 안 좋으세요? 네?”
혹시 급성 심근경색 같은 건가 싶어 겁이 나서 묻자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바로 은하가 들고 있는 대걸레였다.
“아니, 제 걸레가 무슨 상관….” 하다가 은하는 헉, 하고 숨을 멈췄다.
아까 대걸레 끄트머리가 뭔가에 부딪히는 거 같더라니!
“큰형님!”
어디선가 고함이 들려오더니 순식간에 검정 양복을 입은 남자들 몇이 사무실에서 우르르 달려 나와 남자를 둘러쌌다.
“어떻게 된 겁니까, 큰형님? 왜 말씀을 못 하십니까?”
“예? 갑빠가 왜요? 갈비라도 나가신 겁니까?”
“어떤 간 큰 놈이 감히 우리 큰형님 갈비를!”
그러니까 은하가 빠르게 유추한 상황은 이랬다. 방금 자신이 조폭 두목의 갈비뼈를 대걸레 자루로 강타해서 부상을 입히고 만 것이다!
--- pp.9~10
가뜩이나 망신살이 뻗친 와중에 조폭 보스가 복수하러 오기까지 할 건 뭐란 말인가. 은하는 그만 기절할 것만 같았다.
한편 두 남자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사람들은 일제히 겁을 먹었다.
“엄마, 저 아저씨들 조폭이야?”
“쉿!”
사색이 돼서 허겁지겁 아이 입을 막는 엄마도 있었다. 모두가 숨죽여 눈치를 보고 있는 그때, 거대한 체격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1억.”
금액이 너무 얼토당토않았기 때문에, 이 말을 금세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은하 본인도 갑자기 저게 무슨 소리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거대한 남자의 옆에 서 있던, 미모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순신 장군, 경매 중인 거 아뇨?”
험악한 말투에 모두들 제 귀를 의심했다. 아니, 저 예쁜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말투가 나와?
아침 이슬을 함초롬히 머금은 수선화마냥 청초한 얼굴을 한 남자가, 다시 한번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아, 말귀 더럽게 못 알아듣네. 우리가 산다고, 그거.”
정작 이순신 장군을 들고 있는 예나는, 웬일인지 아까부터 눈을 크게 뜨고 보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사회자가 예나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들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예. 시작가는 만 원입니다. 그러니까 만 원부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보스가 입을 열었다.
“제가 1억에 사겠습니다.”
낮고도 차분한 목소리가 조용해진 장내에 울려 퍼졌다.
--- pp.50~51
“만약 한 사람이라도 떨어지면, 제가 대표님 소원 하나 들어드릴게요.”
은하의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지환 쪽이었다. 내가 무슨 소원을 말할 줄 알고 겁도 없이? 하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신 제가 이기면 고등학교 검정고시 과정까지 가르치게 해주세요.”
기어이 녀석들을 고졸까지 만들어놓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물론 동생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환은, 자신이 질 리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이기는 내기를 마다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결국 지환은 유혹에 지고 말았다.
“지면 뭐든지 들어주는 거, 맞습니까?”
아직은 무슨 소원을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기고는 싶었다.
“물론이에요.”
은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제 손에 비하면 아기 손 크기만 한 작은 손가락에, 지환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계약 성립이에요.”
--- pp.149~150
부들부들 떨면서 초조하게 생각하는데, 저만치 앉아 있던 지환이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은하는 움찔했다.
“나쁜 짓 좀 하겠습니다.”
지환이 슈트의 단추를 풀기 시작해서 간이 콩알만 해졌다.
“대, 대표님. 왜 그러세요?”
상의를 벗어버리고 와이셔츠 바람이 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바람에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지만, 좁은 해동실 안이라 더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가 손을 뻗는 순간, 은하는 하마터면 비명을 비명을 지를 뻔했다.
“…!”
그러나 지환은 단순히 자기 슈트 상의를 은하의 어깨에 걸쳐줄 뿐이었다. 워낙 체격 차이가 크다 보니 어른 옷을 걸친 어린애 꼴이 돼버렸다.
‘옷 벗어주는 게 왜 나쁜 짓이야?’
안도의 한숨과 함께 생각하는데 지환이 은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대표님?”
놀라서 부르자 그가 대답했다.
“뺨은 나가서 맞겠습니다.”
그러더니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은하를 제 다리 위에 앉히고 품에 감싸듯 꼭 껴안는 것이었다. 강조하지만 은하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왔으며 스물일곱 평생 연애는커녕 소개팅이나 데이트조차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남자라면 손조차 잡아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때 현우 오빠랑 손을 잡았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모태솔로인 은하가, 지금.
…남자 품에 폭 안겨 있는 거였다.
--- pp.178~179
빰빠밤빠바 빰빠밤빠밤빰빠! 쿵짝짝짝!
동시에 머리에 종이 고깔모자를 쓴 덩어리들이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 나와 노래를 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큰형님 연애를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큰형님 연애를 축하합니다!”
광란의 막춤과 곁들여서.
“형님, 축하드립니다!”
노래가 끝나고, 일영의 선창에 나머지 열 명이 뒤이어 합창을 했다.
“축하드립니다!”
내내 눈만 깜빡이고 있던 지환이 한참 후에야 제일 가까이 있던 막내 민규에게 물었다.
“연애?”
“예, 형님.”
싱글벙글하며 대답하는 민규에게서 시선을 거둔 지환은 그 옆의 덩어리에게 물었다.
“누가?”
“큰형님께서요.”
약간 자신 없어진 말투로 대답하는 덩어리에게서 시선을 옮겨, 또 그다음 덩어리에게 질문했다.
“누구랑?”
“은하 누님하고요.”
이쯤 되자 아차 싶었는지 일영이 속삭이듯 물었다.
“아닙니까?”
일영의 눈을 들여다보며, 지환도 덩달아 속삭이듯 대꾸해주었다.
“아닌데?”
그제야 사색이 된 덩어리들이 화들짝 놀라 일렬로 서서 차렷 자세를 했다.
“…하여튼 쓸데없는 짓들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한번 쭉 훑어봐주고, 지환은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색테이프 뭉치를 발끝으로 찼다.
“치워라, 얼른.”
“예, 형님!”
덩어리들이 합창을 했다.
--- pp.255~256
- 하지만 저는… 지환 씨의 마음을 받아드릴 수가 없어요. 저한텐 현우 오빠가… 오빠 외에 다른 사람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요.
은하는 죽을 만큼 미안한 모양이었지만 사실 지환은 별로 상처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심 기쁘기까지 했다. 어차피 그 서현우도 나 아닌가. 내가 그렇게까지 좋은가 싶어서 가슴이 뭉클한 나머지, 하마터면 내가 바로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현우 오빠라고 말해버릴 뻔했다. 결국 말하지 못한 것은 은하를 위해서였다. 지금쯤 오빠가 검사가 돼 있을까, 의사가 됐을까 하며 기대하고 있는 여자에게 기껏 전직 깡패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서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은하가 자기 때문에 지환이 인생을 망치게 됐다며 심하게 자책하게 될까 봐 그게 제일 걱정되었다.
--- pp.294~295
커다란 남자가 은하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비겁한 짓을 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은하는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모든 걸 다 자기 잘못으로 돌린다. 명백한 내 잘못마저도.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지환이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비겁해지겠습니다.”
가슴이 두근, 하는 순간에는 이미 그의 품 안이었다.
“받아달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받아주실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
“단지 앞으로는 은하 씨가 소양호를, 어떤 사람한테서 이 말을 들은 곳으로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은하를 꼭 껴안으며 지환은 말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 pp.360~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