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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사람과의 통화

창비시선-509이동
김민지 | 창비 | 2024년 09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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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184g | 125*200*10mm
ISBN13 978893642509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혼자 있는 공간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공간이 될 것처럼

가만히 있는 혀의 감각을 익히며
‘아’ 소리를 낸다

떠오르는 감정에 따라 ‘아’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호흡을 다 쓰고 나면 아무 말이나 해본다

입안을 벗어나지 않지만 움직이고 있는
혀의 심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느끼고 말하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대기실」 중에서

그날 밥상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던 밑반찬, 바위보다 많은 파도를 만난 방파제, 수증기를 달고 사는 욕실 거울, 숨어서 알을 까는 곤충들의 더듬이, 점선을 따라가다 부러뜨린 칼날, 설마와 혹시의 우정, 다른 사람 집에 흘리고 온 머리카락, 힘이 들어간 구두 속 발가락, 공기를 밟고 올라서다 넘어지는 취객의 목소리, 언덕 위의 반지하, 평일 은행원의 시재
---「꿈의 꿈치들」 중에서

해가 쨍쨍한 날
고개를 숙이고 걷던 이에게
말라 죽은 지렁이를 보여준다

(...)

비록 눈살은 찌푸렸지만
지렁이의 이로움엔 유감이 없는 사람

그럼에도 그 사람이
스스로 눈살을 찌푸린 이유에 대해 생각할지

어떤 기쁨은 알 수 없다

눈이 부시다는 이유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이유로

어떤 슬픔이 꿈틀거리는지
너무 환한 날에 멀어지는지
---「어떤 기쁨은」 중에서

세상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해서 벌 받는 사람도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지 않았다고 자랑할 사람도 있는데
너는 네가 어떤 짓을 해도 소용없다 느끼니까

말한다고 달라질 게 없겠지만
힘에 부치면 말해
고르고 고르는 게 슬프면 말해

강아지가 작은 공을 입에 물고 오듯
생활이 물고 온 말들을 몇번이고
적당한 거리에 던져줄게

많은 것 중에
사람을 잘 보는 사람

네가 반복하는 만큼
세상은 침이 묻고 단정해진다
---「실키」 중에서

아빠의 엄마는 머릿속이 온통 온점이었다
뇌 하나가 시꺼먼 온점이 될 때까지 살았다

엄마의 엄마는 조금 더 오래 살았다
무릎이 얼굴을 볼 때까지

번지고 굽어가는 게
덜 마른 옷을 입은 채 스스로 체취를 맡는 게
인생 같았다

구르지 않는 시간이었다

(…)

가끔 자는 엄마 코끝에 손을 얼쩡거리며 아빠를 생각한다
이 정도 바람이 좋은 것 같다

삶에 말을 건다
---「불릿의 시」 중에서

1. 익명의 가마우지는 콧구멍 없이 태어난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2. 익명의 블롭피시는 심해에서만 외모가 빛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3. 익명의 일각고래는 대체로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4. 익명의 아이벡스는 긴 뿔이 자신의 등을 향해 자라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5. 개별적으로 초대하지 않은 사용자가 파일을 보고 있습니다.

다음 밑줄에 들어갈 말을 서술하시오.

익명의 아홀로틀은 타고난 신체 회복 능력 때문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중요한 내용이라 밑줄을 그었습니다.
---「유형성숙」 중에서

물이 닿는 모든 자리가 깨끗해지진 않는다
지하철도 지하로만 다니지 않고
잔뜩 취한 사람 옆에서
꽤 오래 문이 열려 있던
냉장고 냄새와 비슷한 냄새를 맡는다
이 감정은 상온에 보관해야 한다
바닥으로 더 들어가는 바닥과 빗물
작은 웅덩이를 피해 걷는 사람들
앞서가는 뒷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어떻게 걸어도 발이 다 젖는 날
줄눈같이 살아남아 물때가 낀다
분홍색 형광펜을 제 몸에 그은 듯
죄다 중요한 사람들
중요하지 않은 게 없어서
더욱 중요해지려는
미끌거림들
---「포트홀」 중에서

웃옷 같은 사람들이
좌우로 나란히
좌우로 나란히

웃옷웃옷웃옷웃옷웃옷
웃옷웃옷웃옷웃옷웃옷
웃옷웃옷웃옷웃옷웃옷
웃옷웃옷웃옷웃옷웃옷
웃옷웃옷웃옷웃옷웃옷

몇벌의 질서를 지켜야만
팔벌려뛰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

웃옷 같은 사람들이
마음 한복판에 모여 있어

내리지 못하는 팔과
모으지 못하는 발과
계속해서 걸쳐지는 기분으로 서 있어
---「웃옷」 중에서

태어난 걸 축하해. 아무도 없을 때 홀로 어느 방바닥과 천장을 쓸고 돌아다니던 냉장고 소리가 너의 전생이었단다. 믿기 싫다면 믿지 않아도 돼. 믿지 않아도 너는 계속돼. 이생에서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원한다면 인간이 될 수도 있어. 인간이 되면 가장 먼저 터널에 가봐. 어려운 시기를 통과한 이에게 긴 터널을 빠져나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대. 요즘 터널은 그때보다 밝은데. 밝아도 여전히 무너질까 두려운 인간들이 그 속에 남아 있다. 그 광경을 보면 너도 조금은 안심하지 않을까. 같은 인간이 만든 것을 전부 믿지 않는 마음. 다 뺏기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된 사랑이 덤불을 이룰 때. 조금 더 함께하려고 뿌리째 힘껏 주먹을 쥔 나무와 서로 손을 뻗고 깍지를 낀 채 자라난 나무들 사이에서 숲의 손등 위를 거니는 기분을 느껴보는 거야. 마침내 긴 터널을 빠져나온 지구의 기분을.
---「깍두기공책」 중에서

딸꾹질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다
고이면서 멀리 가는 것에는 형체가 없다

거짓말이다
하루 더 살고 알았다

지겨움을 이기는 자신 없음
죽음보다 먼저 일당을 번다
그것을 기다릴 게 아니었나

순서 없는 일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
그래서 안 되는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

그래, 대답하지 않고
잠든 사람과의 통화를 마치지 못한다
---「인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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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의 시를 읽다보면 자꾸만 단어 하나에 오래 머물게 된다. 『잠든 사람과의 통화』를 읽기 전까지 나는 ‘들러리’가 순우리말인 줄 몰랐다. 시집 속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내가 아는 것일까, 모르는 것일까? 알았지만 지금은 모르는 것, 모르는데 알 것 같은 것들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빈 곳이다. ‘헤드룸’과 ‘모빌’, ‘공간’과 ‘연면적’, ‘들숨’과 ‘날숨’, ‘향미’와 ‘증진’의 사이. 하나의 단어는, 두개의 단어는, 세개의 단어는, 무수한 단어는 내가 아는 삶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 같다. “너의 전제”와 “너의 전체”와 “너의 천체”는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정말 다른가? 무심코 지나쳤던 모든 단어들에 대한 의심이 불쑥 피어나고, 김민지의 호기심과 모험을 따라가다보면 그 사이에 있는 사람과 세계까지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의심은 나를 불안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생활 탐구에 가깝다. “열매에서 꽃 모양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과일의 단면을 자르는 것처럼, “웃옷 같은 사람들”이 “웃옷웃옷웃옷웃옷웃옷” 손을 잡고 달려가는 풍경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읽고 나면 더 궁금해지는 세계가 여기 있다. 『잠든 사람과의 통화』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독자들에게도 전화기 너머 꿈과 현실의 공간 모두를 확장해주길 기대해본다.
- 강성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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