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부장은 오래전에 닫았던 비밀파일 윤영자 편을 다시 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우리는 한 조각 파편이 되었다. 각자 살아가게 됐다. 혼자가 주는 편안함이 없지 않았다. 누군가 외롭지 않느냐고 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혼자가 주는 편안함을 내주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사실, 관계라는 것이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가. 상대방 심기까지 신경 써야 하는데…. 남 눈치 보며 힘든 삶을 살 필요는 없다는 게 요즘 세상 분위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원초적 본능은 숨죽이고 있다. 같이 하고 싶다…. 혼자의 편안함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을 때쯤, 어느 날 누군가 깃발을 올리면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손가락질만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돌팔매를 날린다. 혼자였다면 못했을 일이다. 그러나 함께라면 특별히 용기를 내야할 일이 아니다. 그 순간, 우리는 알지 못하는 평안함을 느낀다. 두려워할 것도 없다. 이왕에 익명으로 하는 짓이니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멋도 모르고 한 일은 ‘가두기’였다.
깃발을 올리고 목표를 지정한 자의 숨은 의도를 따라서….
그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를 가둔다.
가두기 가담자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다. 이 사회의 가장 엘리트 집단으로 꼽히는 판사, 검사, 의사, 언론인…. 그들도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갇힌 채, 정의와 진실의 이름으로 불의와 거짓을 저지른다. 그들도 어찌 보면 피해자일 수 있지만, 프레임에 갇힌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거짓진실만 외친다.
틀에 갇힌 자들이 또 다른 틀을 만들어 사람들을 가두는 세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갇혔다.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정말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세상이다.
틀을
부서뜨려야 한다.
깨뜨려버려야 한다.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
정 부장은 마지막 한 줄을 썼다가 지웠다.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기회에 진실의 한 쪽 끝자락을 잡은 느낌을 표현한 문장이었다.
아무리 비밀파일이기는 하지만 아직 그걸 기록으로 남기는 게 망설여졌다.
그래, 반대쪽 끝자락에 도달할 때까지는 참자!
--- 본문 중에서
정 차장은 자신의 비밀파일 중 윤영자 편을 마무리했다.
「이 글은 윤영자 사건이 일어난 이후 6년여에 걸친 기록이다. 처음부터 품었던 의문들을 정리했다. 누구나 가질 만한 의문들이다. 그러나 이해가 얽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런 의문들이다.
그리고 나에게 되묻는다. 이 사건 무대 커튼 뒤에 있는 것을 못 본 건지, 안 본 건지, 봤지만 용기가 없어 고개를 돌렸는지….
어쨌든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진실을 밝히겠다고 발버둥을 쳐본들, 또 진실을 밝혀낸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지 않은가? 이제 더는 그들에게 법의 관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용서를 추구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죄를 벌하는 수단이자 근거이다. 또 한 개인을 파멸시키거나, 진실을 파묻을 때 교활하게 활용되기도 한다. 그럴수록 합법을 가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합법적 폭력, 합법적 탈법은 저질러진다. 그래도 법에 기대를 거는 까닭은 가끔은 숨이 다 넘어간 진실과 정의를 되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진실을 덮으려 한 자, 진실을 왜곡시킨 자, 진실을 묻어둔 자들이 대답할 차례다.」
정 차장은 그렇게 쓰고 비밀파일을 닫았다.
그리고 여섯 달쯤 뒤 익명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 … 윤기덕과 함께 수감 중이었던 안양교도소 재소자 박광덕과 노규태가 검찰에 제보한 내용입니다.
‘윤기덕이 불륜 관계를 깨끗하게 해결해 달라는 윤영자의 말을 죽여 달라는 말로 오해했다고 털어놓았다.’
‘윤기덕이 윤영자를 물고 들어가야 징역 20년을 10년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 그러나….”
정 차장은 편지 읽기를 거기서 멈췄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