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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평전

이중섭평전

: 흰 소의 화가, 그 절망과 순수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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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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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0년 07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95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71991220
ISBN10 89719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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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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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연보
1916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에서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은 대지주 집안, 어머니 쪽은 평양의 민족자본가 집안이었다.

1920 5세 무렵, 이중섭이 날 때부터 앓던 아버지가 죽었다. 이 즈음부터 그리기와 만들기에 깊은 흥미를 나타냈다.

1923 8세. 마을 서당에서 배우다가 곧 평양 외가로 가서 종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고학년때에는 그림 그리기에 상당한 수준을 나타내 학교에서 그림이라면 단연 그를 꼽을 정도였다. 6년 내내 한 반이었던 김병기네 집에 자주 가서 그의 아버지 김찬영의 화구와 미술서적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 경력을 가진 이름난 유화가였던 김찬영은 1926년부터 1929년 무렵까지 활발했던 평양의 미술단체 삭성회를 이끌기도 했으므로 이중섭에게 자극과 영향을 준 바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1931 16세. 복학 직후, 도화와 영어를 담당하는 교사로 임용련이 부임해왔다. 그는 미술실을 확보하고, 아내이며 유화가인 백남순과 더불어 주말마다 학생들과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고 품평회를 열였다. 임용련은 이중섭의 그림을 수업 때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장래의 거장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중섭은 한글 자모로 구성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한자나 한글 이외의 다른 문자로 서명하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으며, 두꺼운 한지에 먹물을 칠한 후 철필이나 펜촉으로 긁어내 흰 바탕이 드러나게 하는 실험적인 방식을 시도햇다. 이후 이는 은박지 그림 등으로 나타나서 이중섭 예술의 한 특장을 이루게 된다. 문학수가 동맹휴학 주동자로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1935 20세. 복학을 포기하고 3년제의 전문 과정인 분카가쿠잉에 입학하였다. 이곳에는 김병기와 문학수가 먼저 입학해 있었다. 입학 동기로는 홍준명, 안기풍, 이정규 등이 있었다. 이중섭의 그림에 대해 교수가 피카소의 모방이라 비판하자 이에 항의하기도 하는 등 갈등을 빚었다. 많은 학생이 모인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조선말 노래를 유창하게 불렀고, 작업으로 어질러진 하숙방에서도 난초를 키우는 정갈함이 있어 급우들의 찬탄을 받았다. 민족 차별 태도가 없었던 화가 쯔다 세이슈를 알게 되어 급속히 가까워졌다.

1936 23세. 5월. 일본 도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인 지유비주쓰카교카이의 제2회 전람회에 3점의 <소묘>와 2점의 <작품>을 내 입선하였고 협회상을 받았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다키구치 슈조, 하세가와 사부로 등이 글을 통해 이중섭의 작품을 극찬하였다. 연말 또는 이듬해 초에 병으로 휴학하고 원산으로 돌아가서 휴양하였다.

1941 26세. 3월.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미술가들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는데 도쿄에서 개최된 그 창립전에 <연못이 있는 풍경>등을 출품하였다. 4월, 제5회 지유텐에 <망월>, <소와 여인>을 출품함으로써 김환기와 문학수ㆍ유영국에 이어 회우로 추대되었고 이마이 한자부로 등에게 격찬을 받았다. 5월에는 경성에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였다. 늦여름부터 초가을 사이 일본에서 돌아와 원산에서 지냈다. 본격적으로 엽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이 해에만 90점 가까이 그려 보냈다. 이 엽서 그림 그리기는 1943년까지 계속된다. 9월부터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의 주소 면에 자신의 이름을 '소탑'(素塔)이라고 썼다. 어린이 그림을 연구하였는데 이런 흔적은 엽서 그림의 원시주의적 화풍과 재료로 드러난다.

1943 제4회 소품전에 출품한 것으로 보이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잠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해 말 평양 체신회관에서 김병기, 문학수, 황염수, 윤중식, 이호련, 황염수 등과 6인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 출품작 가운데는 소 그림이 많았다고 한다.

1946 31세. 2월 조선예술동맹 산하의 미술동맹 원산지부 회화부원이 되었다. 또한 조선미술협회를 탈퇴했던 사람들로 구성된 조선조형예술동맹에 가입하였다. 이 모임에서 단상에 올라가 발언 중인 길진섭의 따귀를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5월에 열린 회원전에 출품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1주일 만에 사직하였으며, 이 무렵 화가 지망생 김인호와 인연을 맺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었으며, 이때 아이의 관에 복숭아를 쥔 어린이를 그린 연필화 여러 점을 넣었다.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잠시 했고,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렸다.

1953 38세. 5월 말 신사실파에 가입했으며, 그 세번째인 동인전에 2점의 <굴뚝>을 출품하였다가 당국의 조사를 받고 철거당했다. 7월 말, 오래 애쓴 끝에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가기 위해 애썼으나 좌절되었다. 이 무렵부터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림을 동봉하기 시작하였다. 8월 휴전이 성립되면서 정부가 서울로 돌아갔다. 이중섭의 고미술에 대한 안목을 신뢰한 통영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교육책임자인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으로 갔다. 이곳 졸업생으로 화가를 지망하던 이성운과 한 방에서 지내며 제작에 몰두, <달과 까마귀>, <떠받으려는 소>,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흰 소>, <부부> 등 여러 작품을 완성하였다.

1954 39세. 봄에 이성운과 통영 일대를 다니면서 풍경화 제작에 몰두하였다. <푸른 언덕>, <충렬사 풍경>,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등을 그렸다. 5월 무렵, 유강렬, 장윤성, 전혁림과 4인전을 열었으며, 양성소에 분규가 생겨 곧 통영을 떠났다. 초여름 무렵 서울로 가 여러 곳을 전전하였으며, 6월 한국전쟁 발발 4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3점의 <소>, <닭>, <달과 까마귀>를 내서 호평을 받았다. 7월에 원산 사람 정치열이 누상동에 있는 집을 제공해주었으므로 여기서 개인전을 열 계획으로 제작에 몰두하였다. 이 집에서 대표작 <도원>, <길 떠나는 가족>등을 그렸다. 연말에 집이 팔리자 이종사촌 이광석 집으로 옮겨 전시회 마무리에 몰두하였다.

1955 40세. 1월 1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박지 그림을 비롯한 소묘 10여 점을 냈다. 일반의 호평과는 달리 몇몇 평자들에게서는 시대 착오적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으며, 출품작 중의 은박지 술을 마시는 등 무리를 했고, 전시가 끝난 후에는기름 값도 제대로 못 받는 등 아내의 빚을 갚아보려는 애초의 목적을 전혀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곧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대구역 앞의 여관과 칠곡의 최태응 집을 전전하며 제작을 계속해 5월에 대구 미국문화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며, 실망과 분노의 감정에다 영양 부족까지 겹쳐 극도로 쇠약해졌다. 당시 미국문화원의 책이마 맥타가트가 이 전시회에 출품한 은박지 그림 3점을 미국 뉴욕 모던아트뮤지엄에 기증하였다. 왜관의 구상 집에서 요양하였으며, 이 무렵 단란한 구상의 가족을 부러운 듯 쳐다보는 자신이 등장하는 <구상네 가족>, <성당 부근>등을 그렸다.

1956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봄에 청량리 뇌병원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원장 최신해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니라 극심한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즉시 퇴원하였다. 그후 상태가 극심히 나빠져 서대문 적십자병원 내과에 입원하였다. 입원한 지 한 달 가량 지난 후인 9월 6일 숨을 거둔다. 3일 뒤 이 사실을 안 친구들이 장례를 치루었다. 화장된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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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그가 살다간 시대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물정도로 불행과 혼란이 극데 달했던 때였다...그러나 그 어려웠던 고난의 시절은 그의 창작 의욕을 꺽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열정적이고 격정적인 삶과 예술을 낳았다. 이중섭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솟아났으며, 그 결과물이 이토록 찬란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저자의 문제의식)

p.213.<흰소>는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띠고 있다. 이 그림 속의 소는 아무도 공격하지 않지만, 건드리면 즉각 반격하며 분노를 토할 듯 하다.(흰소에 대한 저자의 평)

p.65. 약간의 지식과 이해로도 문학수나 이중섭의 작업이 이 민족의 특성을 훌륭히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구근대 미술양식에 의해 자라나고 겨우 여기까지의 미로에 도착한 일본작가들에게는 역으로 문학수나 이중섭의 작업성격이 하나의 큰 반성의 쐐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1941년 4월 일본의 미술잡지 {비노쿠니}에 실린 한 평론)

p.267.그(이중섭)은 누구에게나 애착을 주는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서양화 도입기에 있어서 가장 먼저 후진성을 탈피한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비록 서구적인 자료로 그림을 그렸을 망정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한 개성적이고 향토적인 작가였다...짙은 토착색...동양화가 갖고 있는 형식적이고 꿈에 잠긴 듯한 특질을 거의 완전무결하게 곁들이고 있다.(김병기의 평)
--- 2000/12/07 (bingreut)
이중섭이 평생 동안 그려오던 소 그림은 통영에서 완성되었다. 오상학교 시절부터 즐겨 그려오던 소 그림이 새롭고 독특한 표현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통여에서 그린 대표적인 소 그림은 <흰 소>와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이다. <흰 소>는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는 소를 그린 작품이며, <황소>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진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는 노을을 배경으로 울부짖는 듯한 소의 머리를 그린 작품이다.

이성운에 따르면, 이중섭은 제주도에서 본 소가 평안해 보여서 이를 많이 그렸는데 이제 통영에서 그 소 그림을 완성했다는 말을 했다 한다. 그의 득의작이라 할 만큼 이중섭은 이 그림들에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의 말대로 서귀포에서 그렸던 수많은 소의 습작을 토대로 드디어 통영에서 맘에 드는 소 그림을 완성한 것이었다.

왜 이중섭은 제주도에서 마음에 드는 소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만 해도 북한에서 지낸 5년 동안의 사실적인 화풍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해 개성적인 화풍을 발전시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서귀포에서 그려진 <서귀포의 환상>이나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등에는 그러한 영향이 드러나 있다. 환상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그림이라 해도 그 요소 하나하나는 사실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통영에서 그려진 소 그림에는 다채로운 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의 경우 소가 고개를 들면서 울부짖는 순간을 포착했는데, 화면의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 양쪽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 벌린 입은 무어라 외치는 듯 한데 이러한 외침소리를 표현하고자 소의 안면과 목 주위를 유달리 주름지게 하였다. 코와 입을 노을만큼 선명한 붉은 색으로 칠하고, 또 이것의 반향인 듯 소의 머리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노을을 층지게 그려 소리가 퍼지는 듯한 느낌을 더욱 강화하였다. 고향 평원군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노을을 배경으로 울부짖는 소는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함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자신과 닮아 있다. 또한 식민지시대부터 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져온 소를 통해 한민족이 처한 상황을 표상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홍익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흰 소>는 이중섭의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이다. 이 그림에서 두드러진 것은 굵고 짧게 그어진 흰 선이다. 형상을 따라 의도적으로 길게 그어진 검은선이 이 흰 선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고 있다. 붓으로 그어진 색이 화면 전체를 덮은 것처럼 보여 놓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종이 위를 물감 칼로 다지면서 바탕을 물감으로 엷게 발라놓았다. 물감 칼로 문질러서 매끄럽게 만든 바탕이 충분히 마른 뒤에 힘찬 붓질을 할 수 있었고, 그 바탕 위에 검은 선을 그었으며 또 그 위에 흰 선들을 강조하듯 적절히 그은 것이다. 이 방식은 <달과 까마귀>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머리 부분은 이런 바탕 위에 선과 색을 더욱 절묘하게 배합하여 그렸다. 특히 검은 색으로 그어진 턱수염은 최대한 거친 느낌을 자아내고 있는데 이 부분은 글씨 예술(서예)에서 '비백'(飛白)이라 부르는 기법을 연상케 한다. 그 위에 찍힌 흰 빛깔의 선도 다른 부분에 그어진 검고 흰 선과는 다른 성격으로 그어져 있다. 특히 코 둘레와 입을 이루는 희붉은 선은 마치 살아 있는 소가 거친 숨을 내쉬며 분노하는 듯 생동감을 더해주고 있다. 머리 부분에서 보인 이러한 절정은 목덜미를 지나 꼬리와 생식기를 거치면서 힘이 분산된다. 이 그림에서도 서예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흰 소>는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띠고 있다. 이 그림 속의 소는 아무도 공격하지 않지만, 건드리면 즉각 반격하며 분노를 토할 듯하다.
--- pp.20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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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엽서 그림
이 책에서는 이중섭을 바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잃어버린 한 고리, 곧 이중섭이 젊은 시절 애인에게 보낸 100여 장에 이르는 엽서 그림들에 대한 소개와 해설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였다. 십수년 전만 해도 유화 이외의 다른 그림은 본격적인 작품으로 보지 않았던 미술계의 태도로 인해 이중섭의 엽서 그림과 은박지 그림은 매우 인색한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통상적인 연애편지 취급을 받아왔던 이 엽서 그림들은, 이중섭의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한편 그가 어떤 습작 과정을 거쳐 거장이라고 부를 만한 실력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여러 책자들에서 순서 없이 흩어놓았던 엽서 그림을 시간순으로 배열, 구성하기를 최초로 시도함으로써 이중섭의 그림이 어떠한 진전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는가를 확연히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2. 조선신미술가협회
이중섭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 고리는 ‘조선신미술가협회’이다. 그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다시피 했던 이 모임은 암흑기인 식민지시대 말기에 유일하게 타올랐던 민족미술단체였다. 이 모임의 성원인 이쾌대·문학수·이중섭 등은 이 시기의 뛰어난 민족시인 이육사·윤동주 등과 마찬가지로 민족미술의 선구자라 할 만한 사람들이다. 불행히도 이들은 모두 혼란기에 죽거나 월북했던 탓에 그동안 금기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임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쾌대 및 그의 형 이여성이 이중섭을 비롯한 이 단체의 구성원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에서는 화가로서의 이중섭에게 적지 않을 영향을 미쳤을 이 단체에 관해 상세히 서술하였다.

3. 민족 고유의 미감과 전통적 소재
이중섭은 서구의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표현기법을 충분히 자기화해냄으로써 민족 풍격이 가득하면서 우리 고유의 미감이 풍부한 그림을 남겼다. 또한 아이와 소, 봉황과 복숭아나무 등 소재에서도 많은 탐구를 거듭했다. 그는 대부분의 소재에서 고구려 벽화나 고려청자의 무늬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와 조선 후기 김정희의 서예 등 여러 종류의 민족문화 유산에서 유래되는 기법을 구사하여 수준 높고 민족색이 풍부한 화면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시인 도연명과 두보의 시정신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길어왔다. 근거 있는 바탕 위에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 같은 덕목들은 사실 8·15해방 이후 지금까지 모든 문화예술 부문의 창작과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인데, 이중섭은 이를 앞선 시기에 이미 일정 부분 탁월하게 이루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4. 한글 서명과 자주적 태도
이중섭은 8·15 이후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자신의 작품에 반드시 한글로 서명했다. 동화주의가 극성이었던 일제강점기 말기에 변함없이 한글로 서명을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중섭은 자주적인 태도가 누구보다도 확고했다. 또한 그는 제국주의의 억압과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이어진 끊임없는 격동과 혼돈의 사회를 살면서 이런 격동과 혼돈을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첨예하게 현실 사회에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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