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에서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은 대지주 집안, 어머니 쪽은 평양의 민족자본가 집안이었다.
1920 5세 무렵, 이중섭이 날 때부터 앓던 아버지가 죽었다. 이 즈음부터 그리기와 만들기에 깊은 흥미를 나타냈다.
1923 8세. 마을 서당에서 배우다가 곧 평양 외가로 가서 종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고학년때에는 그림 그리기에 상당한 수준을 나타내 학교에서 그림이라면 단연 그를 꼽을 정도였다. 6년 내내 한 반이었던 김병기네 집에 자주 가서 그의 아버지 김찬영의 화구와 미술서적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 경력을 가진 이름난 유화가였던 김찬영은 1926년부터 1929년 무렵까지 활발했던 평양의 미술단체 삭성회를 이끌기도 했으므로 이중섭에게 자극과 영향을 준 바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1931 16세. 복학 직후, 도화와 영어를 담당하는 교사로 임용련이 부임해왔다. 그는 미술실을 확보하고, 아내이며 유화가인 백남순과 더불어 주말마다 학생들과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고 품평회를 열였다. 임용련은 이중섭의 그림을 수업 때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장래의 거장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중섭은 한글 자모로 구성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이 무렵부터 그는 한자나 한글 이외의 다른 문자로 서명하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으며, 두꺼운 한지에 먹물을 칠한 후 철필이나 펜촉으로 긁어내 흰 바탕이 드러나게 하는 실험적인 방식을 시도햇다. 이후 이는 은박지 그림 등으로 나타나서 이중섭 예술의 한 특장을 이루게 된다. 문학수가 동맹휴학 주동자로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1935 20세. 복학을 포기하고 3년제의 전문 과정인 분카가쿠잉에 입학하였다. 이곳에는 김병기와 문학수가 먼저 입학해 있었다. 입학 동기로는 홍준명, 안기풍, 이정규 등이 있었다. 이중섭의 그림에 대해 교수가 피카소의 모방이라 비판하자 이에 항의하기도 하는 등 갈등을 빚었다. 많은 학생이 모인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조선말 노래를 유창하게 불렀고, 작업으로 어질러진 하숙방에서도 난초를 키우는 정갈함이 있어 급우들의 찬탄을 받았다. 민족 차별 태도가 없었던 화가 쯔다 세이슈를 알게 되어 급속히 가까워졌다.
1936 23세. 5월. 일본 도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인 지유비주쓰카교카이의 제2회 전람회에 3점의 <소묘>와 2점의 <작품>을 내 입선하였고 협회상을 받았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다키구치 슈조, 하세가와 사부로 등이 글을 통해 이중섭의 작품을 극찬하였다. 연말 또는 이듬해 초에 병으로 휴학하고 원산으로 돌아가서 휴양하였다.
1941 26세. 3월.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미술가들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는데 도쿄에서 개최된 그 창립전에 <연못이 있는 풍경>등을 출품하였다. 4월, 제5회 지유텐에 <망월>, <소와 여인>을 출품함으로써 김환기와 문학수ㆍ유영국에 이어 회우로 추대되었고 이마이 한자부로 등에게 격찬을 받았다. 5월에는 경성에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였다. 늦여름부터 초가을 사이 일본에서 돌아와 원산에서 지냈다. 본격적으로 엽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이 해에만 90점 가까이 그려 보냈다. 이 엽서 그림 그리기는 1943년까지 계속된다. 9월부터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의 주소 면에 자신의 이름을 '소탑'(素塔)이라고 썼다. 어린이 그림을 연구하였는데 이런 흔적은 엽서 그림의 원시주의적 화풍과 재료로 드러난다.
1943 제4회 소품전에 출품한 것으로 보이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잠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해 말 평양 체신회관에서 김병기, 문학수, 황염수, 윤중식, 이호련, 황염수 등과 6인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 출품작 가운데는 소 그림이 많았다고 한다.
1946 31세. 2월 조선예술동맹 산하의 미술동맹 원산지부 회화부원이 되었다. 또한 조선미술협회를 탈퇴했던 사람들로 구성된 조선조형예술동맹에 가입하였다. 이 모임에서 단상에 올라가 발언 중인 길진섭의 따귀를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5월에 열린 회원전에 출품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1주일 만에 사직하였으며, 이 무렵 화가 지망생 김인호와 인연을 맺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었으며, 이때 아이의 관에 복숭아를 쥔 어린이를 그린 연필화 여러 점을 넣었다.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잠시 했고,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렸다.
1953 38세. 5월 말 신사실파에 가입했으며, 그 세번째인 동인전에 2점의 <굴뚝>을 출품하였다가 당국의 조사를 받고 철거당했다. 7월 말, 오래 애쓴 끝에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가기 위해 애썼으나 좌절되었다. 이 무렵부터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림을 동봉하기 시작하였다. 8월 휴전이 성립되면서 정부가 서울로 돌아갔다. 이중섭의 고미술에 대한 안목을 신뢰한 통영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 교육책임자인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으로 갔다. 이곳 졸업생으로 화가를 지망하던 이성운과 한 방에서 지내며 제작에 몰두, <달과 까마귀>, <떠받으려는 소>,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흰 소>, <부부> 등 여러 작품을 완성하였다.
1954 39세. 봄에 이성운과 통영 일대를 다니면서 풍경화 제작에 몰두하였다. <푸른 언덕>, <충렬사 풍경>,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등을 그렸다. 5월 무렵, 유강렬, 장윤성, 전혁림과 4인전을 열었으며, 양성소에 분규가 생겨 곧 통영을 떠났다. 초여름 무렵 서울로 가 여러 곳을 전전하였으며, 6월 한국전쟁 발발 4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3점의 <소>, <닭>, <달과 까마귀>를 내서 호평을 받았다. 7월에 원산 사람 정치열이 누상동에 있는 집을 제공해주었으므로 여기서 개인전을 열 계획으로 제작에 몰두하였다. 이 집에서 대표작 <도원>, <길 떠나는 가족>등을 그렸다. 연말에 집이 팔리자 이종사촌 이광석 집으로 옮겨 전시회 마무리에 몰두하였다.
1955 40세. 1월 18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박지 그림을 비롯한 소묘 10여 점을 냈다. 일반의 호평과는 달리 몇몇 평자들에게서는 시대 착오적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으며, 출품작 중의 은박지 술을 마시는 등 무리를 했고, 전시가 끝난 후에는기름 값도 제대로 못 받는 등 아내의 빚을 갚아보려는 애초의 목적을 전혀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곧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대구역 앞의 여관과 칠곡의 최태응 집을 전전하며 제작을 계속해 5월에 대구 미국문화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며, 실망과 분노의 감정에다 영양 부족까지 겹쳐 극도로 쇠약해졌다. 당시 미국문화원의 책이마 맥타가트가 이 전시회에 출품한 은박지 그림 3점을 미국 뉴욕 모던아트뮤지엄에 기증하였다. 왜관의 구상 집에서 요양하였으며, 이 무렵 단란한 구상의 가족을 부러운 듯 쳐다보는 자신이 등장하는 <구상네 가족>, <성당 부근>등을 그렸다.
1956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봄에 청량리 뇌병원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원장 최신해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니라 극심한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즉시 퇴원하였다. 그후 상태가 극심히 나빠져 서대문 적십자병원 내과에 입원하였다. 입원한 지 한 달 가량 지난 후인 9월 6일 숨을 거둔다. 3일 뒤 이 사실을 안 친구들이 장례를 치루었다. 화장된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