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장 물리학자의 연구실 세계양궁연맹에다 되돌려 주고 싶은 기념품 16 굳이 옷 입는 스타일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22 25년 전, 아르메니아에서 가져온 설탕 펜치 27 병따개로 배우는 물리학 상식 34 ‘에릭’이라는 이름의 핑크빛 로봇 39 몽골에서 풍기는 버터 향기 44 손잡이가 깨진 도자기의 가격? 51 영혼을 갉아먹는 연필깎이 소리 56 목각 인형 아가씨, 왜 내 눈길을 피하시나요? 62 데뷔도 하기 전에 이미 만화가가 되었다 69 물리학자가 동화를 쓰게 된 사연 74 2장 만화가의 단골 카페 취미 생활은 연애와 똑같다 86 민트 티와 튀니지에서 데리고 온 사자 한 쌍 90 범상치 않은 ‘포르투갈 사나이’ 설탕그릇 99 남지도 않고, 남아도 좋은 브라우니 104 보드카를 마시려면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 111 와인병에 똥구멍이 달린 이유 117 막대 사탕의 창시자, 피에로 구르망 123 빵은 사연과 함께 먹어야 맛있다 128 티를 마시는 것은 마술을 부리는 것 133 3장 알리바바의 보물 창고 세상을 여행하는 녹색 에마야주 144 내 인생은 프라리옹에 오르기 전과 후로 나뉜다 152 막포도주를 담기엔 너무 예쁜 코발트 병 160 수건에 둘둘 말아 가지고 다니는 전용 술잔 164 채린이의 오래된 밥그릇 169 서촌 길을 누비는 롤리 자전거 178 장난감인가요, 라디오인가요? 183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대한 뒷이야기 188 마이 소울 시티, 포르투갈의 발르드바르구 193 자나 깨나 야구만 생각나던 시절이 있었다 201 “아니, 이제는 개집까지 모으냐?” 208 내 최고의 컬렉션은 한옥 갤러리 217 4장 할머니의 골동 부엌 날렵한 야채수프용 국자 230 외롭거나 추울 땐 레몬&오렌지즙이 좋다 235 손잡이가 달린 제빵 방망이 242 왠지 도시락을 싸고 싶은 날 247 시장에서 산 토끼 고기로 뭘 만들까 252 이보다 더 달걀을 잘 자를 수는 없다 258 물리넥스 씨, 멋있게 갈아 주는 기구가 필요해요 264 나는 왜 행주에 집착하는가 270 가난한 지혜가 만든 철사 바구니 277 얼음 통과 각설탕 통 사이 281 이바라키 현의 바닷가를 생각하며 286 세상에서 제일 싼 정어리 깡통 291 |
저이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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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물리학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철저하게 과학적 사고로 무장된 사람일 거라고 나는 자주 오해를 받곤 한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내 일상은 오히려 지극히 게으르고 비과학적이다. 실험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무엇이든 대충 하길 좋아하고, 공상에 자주 빠지고, 가끔 술 한 잔에 망가지기도 하고, 가장 비과학적인 것들을 상상하며 노는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머리에 쓰면 몸이 보이지 않는 ‘도깨비 감투’를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상상.”
“내가 오래된 물건을 단순한 물건 자체로 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안에 서로 다른 시간 여행의 축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공간이야말로 곧 벼룩시장이 아닌가. 어떤 사람에게는 버려진 물건이나 쓰레기 정도로 치부되겠지만 그곳엔 분명 서로 다른 시간의 축이 만드는 타임캡슐 같은 공간이 있다. 물리학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당시 아르메니아는 아직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지 않은 상태여서 레닌의 초상이 관공서 입구마다 걸려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옆 나라 아제르바이잔과 국경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문 국제 면에 그 전쟁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무모한 나의 도전에 찬성한 사람은 오직 어머니 혼자였다. “가고 싶으면 가야지!” 한번 이런 열정에 사로잡히면 나는 앞뒤를 못 가리는 상태가 된다. 일종의 ‘몰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들이 보기에 이런 상태의 나는 뭔가에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다. 혼자서 “그래, 한 건 했다!” 주문을 외우면서 행복해한다. 세상엔 이런 흥분과 열정에 빠질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얼마나 고마운 열정인가?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은, 세상과 다른 차이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타인과 다른 옷을 입고, 타인의 생각을 살짝 비틀어 다른 생각을 하고, 타인이 했던 방법을 발판으로 삼아 다른 필드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 타인이 접근했던 길을 피해 다른 쪽으로 가면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타인과 다른 방법으로 특별한 사랑에 접근하고, 결국 차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 --- 본문 중에서 |
“서강대 물리학과 이기진 교수는 왜 자꾸만 ‘딴짓’하고 싶을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며 거기서 승부를 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면서 재미나게 살아볼 수도 있다. 서강대학교 이기진 교수는 물리학자로서 매일 연구에 빠져 고리타분하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실험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부터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뭔가에 미친 사람처럼 딴짓에 빠져든다. 글을 못 읽어 학교를 그만두었던 소심한 소년이 물리학에 심취하면서 공부에 빠져들고, 아르메니아공화국, 파리, 일본의 다양한 문화를 섭렵하면서 딴짓의 고수가 되어버린 사연. 한 남자의 진지하고도 웃기며 고집스럽게 단조롭고도 비교할 수 없게 독특한 ‘딴짓’의 파노라마. 그런 물리학자가 키운 딸이 투애니원의 ‘씨엘’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정신없이 지저분하고, 개집부터 조선 백자까지 별별 것이 다 널린 연구실에 앉아 몽상에 빠지는 남자” 이기진 교수의 연구실에 처음 들어선 사람은 일단 입부터 쫙 벌린다. 온갖 책과 논문 다발이 켜켜이 쌓여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군데군데 세워진 깡통 로봇은 대체 뭔가. 어떤 것은 사람 키만큼 크고 어떤 것은 저금통처럼 앙증맞다. 하나하나 이름까지 달린 이 로봇들은 파리의 아트페어에 나가 비싼 값에 팔리기도 한다. 서너 개 놓인 원색의 의자도 그가 직접 디자인해서 만든 것이다. 벽에는 심심할 때마다 그린 엉뚱한 그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고미술 상가에서 구입한 이빨 나간 조선 백자들이 장독대처럼 놓였고, 홍차를 거르는 기구가 널려 있으며, 부엌에서나 쓰일 만한 조리 기구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바닥에는 튀니지에서 사온 커다란 호랑이 조각상이 눈을 부릅뜨고 빤히 쳐다보고 있고, 어떤 책상에는 낡고 허름한 진짜 개집까지 올려져 있다. 이쯤 되면 그동안 갖고 있던 뭔가 반듯하고도 청결할 거라는 ‘물리학자’에 대한 선입견이 단숨에 깨질 수밖에 없다. “1년에 한 번만 몰아서 옷을 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커피를 사는 이상한 남자” 그러나 여러 연구원과 학생을 데리고 복잡한 마이크로파 물리학을 연구해야 하는 학자로서 삶의 이면은 지극히 고집스럽고 단조롭다. 고르는 게 힘들어서 바지는 오직 한 브랜드 옷만 입고, 1년에 한 번 티셔츠를 색깔별로 왕창 사서 돌려 입는다. 양복과 넥타이라곤 오직 학회 때 필요한 딱 한 벌뿐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들르기에 커피점에선 점원과 눈빛으로만 대화를 나누고, 대학생 때부터 다니던 술집만 몇 십년째 다닌다. 한창 내전중이던 아르메니아에서 2년간 연구하며 가난하지만 순수한 친구들을 사귀었고, 지도교수와 밤을 새워가며 연구하다가 사는 얘기를 나누다가 그렇게 7년을 일본에서 보냈다. 귀국할 때 가방에 가득 싸가지고 온 것은 오직 책과 이빨 나간 도자기 그릇뿐. 대다수 사람들이 가장 화려하게 신경 쓰고 남의 눈치를 보며 성취하고자 하는 현실을 오히려 절제하고 단조롭게 유지하면서 살기에, 그 나머지 삶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깊이 몰입하면서 ‘딴짓’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단골, 오래된 그릇, 오래된 집에만 탐닉하는 정말 특이한 남자” 그는 일본의 옛 거리와 파리의 오래된 건물을 좋아해서 1년에 한 번은 찾아가 그동안 쌓인 현대의 독을 풀고 온다. 술집도, 빵집도, 막걸리집도, 여행가면 묵는 호텔도 꼭 한 군데만 다닌다. 그래서 주인들과는 앉기만 하면 알아서 음식을 내오고, 방 키를 주는 사이가 되어야 마음이 편하다. 25년 전부터 맺어온 인연으로 1년에 한 번 연구를 위해 아르메니아에 가서 친구 집에 묵으며 가족 같은 생활을 하다 온다. 7년간 모셨던 일본의 지도교수도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초청하여 사제 간의 정을 다진다. 어딘가 약간 깨지거나 이빨이 나간 그릇에 더 애정을 느껴서 그런 가치 없는 것들을 사모아 식기로 쓴다. 고미술 상가와 벼룩시장에 내버려진 물건들을 사서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기쁨이 크다. 오래된 집에 대한 열망을 품다가 기어이 10년 전에 창성동에 있는 작은 한옥 주인이 되었고, 혼자만 즐기는 것이 아쉬워 현재는 갤러리로 쓰고 있다. 신선한 젊은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달마다 여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오래된 것에는 흘러온 시간과 역사가 담겨 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타임머신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오래된 것을 알아보고 아끼는 사람의 마음에서만 가능하다. 오래된 친구와의 우정, 인간 관계도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투애니원의 ‘씨엘’ 같은 개성 강하고 당당한 아가씨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혜성같이 등장한 투애니원은 노래나 패션, 스타일, 그리고 각각의 구성원들만 봐도 비슷한 시기에 출몰한 다른 걸그룹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특히 그룹 리더인 ‘씨엘’을 볼 때마다 다들 느꼈을 것이다. 저 어린 가수의 주저함 없는 당당함, 그리고 전혀 남과 비슷하지도 않은 개성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씨엘은 채린이의 영어 약자이고, 그 채린이가 바로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이기진 물리학자의 큰딸이다. 물리학자는 세 살밖에 안 된 씨엘을 데리고 파리에서의 다락방 생활을 감행했다. 우유를 타기 위해 무거운 생수병을 다락방까지 이고 가거나 유모차를 내리는 것이 힘들다는 것만 빼면 행복한 나날이었다. 일본에서는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채린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줬다. 맘속으론 걱정이 한 가득이었지만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는데, 어느 날 “아빠, 일본 말로 ‘나랑 같이 놀래?’가 뭐야?” 하고 묻기에 ‘이제 됐다’ 하고 마음을 쓸어내렸다. 한적한 시골 다다미집에서 가족이 모여앉아 오직 전축으로 음악만 듣는 한적한 생활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매일 부엌 가득 향기를 풍기며 브라우니를 만들어서 학교 행사에 들고 가던 씨엘. 오래된 물건들 속에서 매일 그림을 그리는 아빠 옆에 나란히 엎드려 생활하던 씨엘의 어린 시절을 보노라면, 이런 멋진 가수로 자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