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의 멋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선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 있는 풍경이 멋있다.
여름은 밤. 달이 뜨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도 반딧불이가 반짝반짝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니는 광경은 보기 좋다. 반딧불이가 달랑 한 마리나 두 마리 희미하게 빛을 내며 지나가는 것도 운치 있다. 비 오는 밤도 좋다.
가을은 해질녘. 석양이 비추고 산봉우리가 가깝게 보일 때 까마귀가 둥지를 향해 세 마리나 네 마리, 아니면 두 마리씩 떼 지어 날아가는 광경에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러기가 줄지어 저 멀리로 날아가는 광경은 한층 더 정취 있다. 해가 진 후 바람 소리나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기분 좋다.
겨울은 새벽녘. 눈이 내리면 더없이 좋고,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것도 멋있다. 아주 추운 날 급하게 피운 숯을 들고 지나가는 모습은 그 나름대로 겨울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이때 숯을 뜨겁게 피우지 않으면 화로 속이 금방 흰 재로 변해버려 좋지 않다.
--- p.11~12
새벽에 헤어지는 법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는, 너무 복장을 단정히 하고 에보시(烏帽子) 끈을 꽉 묶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올 때도 일어나기 싫은 듯이 우물쭈물하다가 여자가 “날이 다 밝았어요. 다른 사람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고 재촉하는 말을 하면 그제서야 겨우 후유 한숨을 내쉬면서 정말 헤어지기 싫다는 듯이 하는 것이 좋다. 그저 우두커니 앉아서 사시누키 입을 생각도 않다가 입을 여자 귀에다 대고 밤에 한 얘기를 속삭이는 듯하면서 손으로는 속곳 끈을 묶고 일어나서는, 격자문을 밀어 올려 쪽문 있는 곳까지 여자를 데리고 간 후 낮 동안 못 만나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다시 한 번 여자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남자가 이런 식으로 해서 나가면 여자 쪽에서는 자연히 그 뒷모습을 쳐다보며 헤어지는 것을 슬퍼한다.
그런데 보통은 그렇지가 않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갑자기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잽싸게 사시누키 허리끈을 묶고, 노시나 포, 가리기누 소맷자락을 걷어 올리는 등 옷매무새를 매만진 다음, 허리띠를 꽉 매고 다시 자리에 앉아서 에보시 끈을 꽉 묶어 안에 집어넣고 반듯하게 다시 쓴다. 그리고 어젯밤 베개 위에 놓아둔 부채나 종이를 더듬더듬 찾다가 어두워서 잘 안 보이면 “어디 있느냐 도대체 어디 있느냐니까” 하며 손으로 방바닥을 쳐서 겨우 찾아낸 다음 후유 간신히 찾았네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러고는 그 부채를 마구 부치며 품에 회지(懷紙)를 집어넣고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이다”라며 돌아가는 것이 보통 남자들의 태도다
--- p. 125~126
향로봉 눈
눈이 아주 많이 왔을 때, 여느 때와는 달리 격자문을 내리고 화로에 불을 지피고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데 중궁께서 “쇼나곤아, 향로봉의 눈은 어찌 되었느냐”¹고 말씀하시어, 격자문을 올리게 하고 발을 높이 말아 올리자² 웃으셨다. 뇨보들도 “그런 것은 다 알고 노래로 읊기도 하는데 지금은 미처 생각을 못 했네. 중궁님 뇨보로는 저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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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백씨문집》 권16 〈향로봉 아래 새로이 산거를 짓고 초당이 비로소 완성되어 동벽에 쓴 시(香爐峯下新卜山居草堂初成偶題東壁)〉 5수 중 제4수 “해는 높고 잠은 충분한데 아직 일어나는 것이 귀찮아/작은 초당에 이불을 겹쳐 덮으면 추위도 두렵지 않네/유애사의 종소리는 베개를 세워 베고 듣고/향로봉의 눈은 발을 들어 올려 보는구나/노산은 즉 이것이로다 세상의 명리를 피하는 곳이로다/사마천 역시 이곳을 노년 보내는 곳으로 삼았도다/마음 평안하고 몸 안녕한 곳 그곳이 돌아갈 곳이로다/고향이 어찌 장안에만 있다고 하겠느냐(日高睡足猶弁起 小閣重衾不殃寒 遺愛寺鐘忿枕聽 香爐峯雪撥簾看 匡廬便是逃名地 司馬仍爲送老官 心泰身寧是歸處 故鄕何獨在長安).”
²원시의 “향로봉의 눈은 발을 들어 올려 보는구나(香爐峯雪撥簾看)”에 따른 행동.
--- p.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