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숨을 죽인 채 어둠을 응시했다. 한여름 밤, 계곡에서 뻗어 나오는 어둠은 차고 습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소년은 생각했다. 지독한 치통이 찾아왔던 작년 겨울의 어느 밤과 비슷했다. 어금니 근처가 근질근질했던 그 밤처럼, 이유 없는 불안감이 소년의 마음속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개구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소년은 텐트 주위에서 울어대던 수많은 개구리가 일제히 입을 닫고 그 큰 눈을 뒤룩거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엄마와 아빠는 번갈아가며 얕은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인 뒤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진 두 사람이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pp. 9-10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황당해할 이야기들이지. ‘밤의 이야기꾼들’은 오래전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해왔어.” 대호 선배는 그렇게 덧붙였다. “오래전부터 내려왔다면 얼마나……….” “글쎄, 20년이 넘었다는 사람도 있고, 그보다 훨씬 더 전이라는 사람도 있지. 중요한 건 현재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거야. 매년 한 번씩, 같은 날 저녁에 멤버가 모이지. 장소며 시간 같은 건 전날에야 연락이 와. ‘밤의 이야기꾼들’ 모임이 있으니 취재를 오라고.” “어떤 사람들이 멤버인가요?” “나도 잘 몰라. ‘밤의 이야기꾼들’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어. 멤버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 신상에는 얼굴도 포함되지.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이야기를 하되 반드시 자신과 관련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뭐, 이런 것들이야. 조금 특이하지?” ---p. 34
“네 애비는 내가 죽였다.” “뭐?”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순간적으로 접수가 되질 않았지. ‘내가’라는 말과 ‘죽였다’는 말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 같았어. 엄마는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씀하셨어. “내가 죽였다고.” “정말? 왜…… 왜?”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죽인 건 아니지.” 엄마의 아리송한 대답에 나는 어리둥절했어. 엄마가 실성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지. “도대체 무슨 말이야? 아빠는, 아빠는 어디 있어?” “사라졌어. 네 애비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제 이 세상에 없어.” ---p. 62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도플갱어는 없다는 거죠? 다 제가 만들어낸 환상이란 거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 얘기를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치료의 시작이니까요.” “그럼 그게 환상이라면, 저는 왜 그런 걸 보는 걸까요?” “음…… 몇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 제일 첫번째는 아마 우울증에서 온 자아 상실감일 겁니다. 어때요? 자신감이 없는 성격인가요? 다른 사람 앞에서 쉽게 위축되는?” B는 대답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짙은 선글라스 속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마스크 아래 입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도. 저는 그것들을 벗겨내고 싶었습니다. B의 맨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의사로서 품어서는 안 되는 잔인한 충동이 제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게 들었습니다. ---pp. 108-109
“모든 게 딱 들어맞으면 이야기가 될 수 없어. 그건 소설이지. 너 실화와 소설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대호 선배의 질문에 나는 생각에 빠졌다. “실화는 아무래도 진짜 있었던 이야기니까 더 현실적이고, 반대로 소설은 지어낸 거니까 더 비현실적이지 않나요?” “틀렸어. 더 비현실적인 쪽은 실화야.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는 게 이 세상이지. 그래서 소설은 결코 실화를 따라잡을 수 없어.” “하지만…….” ---p. 132
눈을 바꿔가며 얼마 동안 들여다보고 있었을까요,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눈을 더 바싹 가져다 댔습니다. 그 무언가는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질감을 가지고 춤을 추듯이 움직이더군요. 사람은 분명 아닌데…… 뭐지? 두려움보다도 궁금증이 앞서 문을 열어보자고 마음먹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눈앞으로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싶더니 외시경이 흐려지더군요. 저는 튕기듯 물러났습니다. 제가 본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 거예요. 그리고 곧, 엄청난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습니다. 제가 무엇을 봤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입이었습니다. 누군가의 크게 벌린 입안……. ---pp. 154-155
시커멓고 거대한 연기 덩어리가 눈앞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기가 힘들었다. 연기 덩어리는 점점 모습을 갖춰갔다. 이빨이 날카로운 난쟁이 여럿으로 변했다가 망가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미소 짓는 여자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러고는 새의 머리를 한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바라봤다. 마지막은 빨간색 마스크를 쓴 여자였다. 마스크를 벗는 모습이 슬로비디오처럼 펼쳐졌다. 귀밑까지 찢어진 여자의 입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입이 천천히 움직이며 나에게 물었다. “나 예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