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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제3의시-12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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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5년 01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131쪽 | 205g | 125*208*20mm
ISBN13 9788970753317
ISBN10 897075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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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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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마음의 길을 펼쳐내는 개펄의 상상력

첫시집 『우울씨의 일일』과 두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에서 시인은 자본주의 혹은 수직으로 세워진 문명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세번째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서 함민복은 문명비평가와 우울증을 떨쳐버리고, 슬쩍슬쩍 존재의 안쪽을 들여다본다. 세번째 시집 출간 후 시인은 강화도로 삶의 거처를 옮긴다. 아니 밀려간다. 여기서 시인은 문명도 존재의 의문을 이전처럼 되새김하지 않는다. 대문을 열면 눈앞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먼지도 일지 않는 바닷길, 거대한 수평선은 딱딱한 땅위에 수직의 길로 세워진 거만한 문명을 일순간에 지운다. 섬과 함께 섬처럼 떠 있는 시인의 마음도 섬으로 밀려오고 다시 밀려가는 바닷물의 흐름과 함께 가득 채워지고 또다시 비워진다. 그렇게 채워지고 비워진 지 어언 10년, 어느 사이 시인의 마음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뻘밭이 되었다. 그리고 마음의 뻘밭에선 문명 속에서 자랄 수 없는 생명의 힘이 꿈틀꿈틀 존재의 구멍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인가, 함민복의 네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은 잘 반죽된 부드러운 개펄에서 캐낸 펄떡이는 시어들로 가득 차 있다.

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지
집들이 다 구멍이네
구멍에서 태어난 물들
모여 만든 집들도 다 구멍이네
딱딱한 모시조개 구멍 옆 게 구멍 낙지 구멍
갯지렁이 구멍 그 옆에도 또 구멍구멍구멍
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제 몸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지은 놈 하나 없네
― 「뻘밭」 전문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전문

위 시에서처럼 개펄의 상상력과 그 언어는 온전한 삶을 걸어가게 하는 길을 제시해준다. 함민복 시인은 개펄의 ‘물골’이야말로 길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육지에 난 물길은 물이 스스로 길을 내어 휘어지고 돌아가면서 강이라는 길을 만들어내지만, 뻘에서는 사람들이 걸어가며 만들어낸 길과 물이 스스로의 본성으로 찾아간 길이 결합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뻘의 물골이다. 하지만 시인은 물길만 보지 않는다. 살아 우는 글자를 찍으며 날아가는 기러기들의 하늘길도 있는 것이다.
“요즘 내가 살고 있는 강화도에서 들을 만한 소리는 기러기 소리다. 하늘에서 나무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 나가보면 수십, 수백 마리 기러기가 하늘에 글자를 쓰며 날아간다. 살아 우는 글자. 장관이다.”
의지만으로 개척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길이라면 개펄의 물골과 새들이 나는 하늘길과 같은 자연의 길은 우리가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삶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아래의 두 시는 그러한 길에 대한 그리운 성찰이다.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나를 위로하며」전문

길 위에 길이 가득 고여 있다
지나간 사람들이
놓고 간 길들
그 길에 젖어 또 한 사람 지나간다

길도 길을 간다
제자리걸음으로
제 몸길을 통해
더 넓고 탄탄한 길로
길이 아니었던 시절로

가다가

문득
터널 귓바퀴 세우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의 소리 듣는다
―「길의 길」전문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마음

부드러운 뻘 속에 구멍을 파고 살고 있는 낙지, 모시조개, 갯지렁이처럼 강화도 동막리 폐가에서 가난과 함께 몸 틀고 사는 시인의 삶은 평온하다. 수평선처럼 낮게 가라앉은 시인의 삶에는 수직으로 곧추선 욕망의 곡예가 없기 때문이다.
시인에 의하면, 수평은 자연친화적이라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반면 수직은 욕망 지향적이고 그래서 불안하다. 인류의 문명은 유한하고 언젠가는 멸망할 운명을 타고났다. 수직으로 높이 쌓으면 쌓을수록 인간의 마음은 더욱 각박해지고 황폐해질 뿐이다.

논과 밭을 일군다는 일은
가능한 한 땅에 수평을 잡는 일
바다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수평의 삶
수천 년 걸쳐 만들어진 농토에

수직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농촌을 모방하는 도시의 문명
엘리베이터와 계단 통로, 그 수직의 골목
― 「김포평야」부분

무반성적인 문명의 수직적인 욕망을 경계하고 있는 시인은, 욕망의 바벨탑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불안함을 아래처럼 기하학적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신이 만든 피라미드
욕망의 샘
저 작은
거웃


만나고 싶은


거웃
이리 큰
욕망의 샘
신이 만든 피라미드
― 「검은 역삼각형」 전문

‘만나고 싶은’ 수평의 삶을 아래 위에서 동시에 찌르고 있는 수직으로 날 서 있는 두 개의 칼날, 그 위험한 삶의 모습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한 위 시는 우리 마음속에 세워진 욕망의 탑을 시각화한 것 같다. 하지만, 수평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시인에게 스며든 자연은 위대한 말씀이 되고 시가 되고 사랑이 된다.

하늘에서 나무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어디로 가는가 기러기 떼
八자 대형으로,
人자 대형으로
동학군의 혼령인 듯,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 인자 쓰며
人乃天
하늘을 自習하며 날아가는
기러기
저리 살아 우는 글자가 어디 또 있으랴
목을 턱 내밀고 날아가는 모습이 서늘하다
― 「최제우」전문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저 보여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제 향기도 당신 닮아
둥그렇게 휘었습니다
― 「달과 설중매」전문

함민복의 시는 욕망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강화도 개펄의 힘을 전해준다. 하지만 정작 시인은 지금도 조용히 마음의 길을 닦고 있다.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옆산에서 꾀꼬리가 운다
새소리 서로 부딪히지 않는데
마음은 내 마음끼리도 이리 부딪히니
나무 그늘에 좀더 앉아 있어야겠다
― 「그늘 학습」전문

회원리뷰 (5건) 리뷰 총점8.2

혜택 및 유의사항?
거대한 반죽 뻘은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헌*가 | 2005.03.02 | 추천2 | 댓글0 리뷰제목
어른보다 생명의 근원에 더 가까운 아기의 살결은 얼마나 부드럽고 빛나는지 보기만 하면 손을 대고 싶어합니다. 투명하기조차 한 아기 살결을 만지고 싶어하는 것은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본능으로 좋아하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생명의 본질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기와 꽃과 같은 존재에게서 생;
리뷰제목
어른보다 생명의 근원에 더 가까운 아기의 살결은 얼마나 부드럽고 빛나는지 보기만 하면 손을 대고 싶어합니다. 투명하기조차 한 아기 살결을 만지고 싶어하는 것은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본능으로 좋아하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생명의 본질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기와 꽃과 같은 존재에게서 생명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꽃 같은 존재인 아기는 부드럽고 동글동글하여 말소리조차 옹알옹알 부드럽고 동그랗습니다. 모름지기 생명은 부드러움과 동글동글함에 가깝습니다. 생명의 물질을 이루는 요소들은 어떤지요. 물은 부드럽게 흐르고 공기는 둥근 가벼움이며, 흙은 보들보들하고 불은 솟구치는 유연함입니다. 네 요소 모두 부드러움과 동글동글함에 가깝습니다. 생명의 본질이 부드러움과 동글동글함에 가깝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떤지요. 부드러움과 동글동글함과는 거리가 먼, 직각이 이루는 딱딱함이 아닌지요. 도시 생활 역시 ‘길이 길을 넘어가는 육교 바닥도 / 척척 접히는 계단 길 에스컬레이터도 / 아파트 난간도, 버스 손잡이도, 컴퓨터 자판도 / 빵을 찍는 포크처럼 딱딱하다 // 메주 띄울 못 하나 박을 수 없는 / 쇠기둥 콘크리트 벽안에서 / 딱딱하고 뜨거워지는 공기를 / 사람들이 가쁜 호흡으로 주무르고 있’(「감촉여행」)습니다. 부드럽고 둥근 생명이 감히 발붙이기 어려운 공간, 차라리 반생명의 공간이 도시입니다. 그리하여 직각이 이루는 딱딱한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옥탑방」)이고, 끝내 ‘온 세상은 하나의 탑이 되’(「김포평야」)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도시가 점점 더 딱딱해지고 반생명의 길을 걷고 있다면 새로운 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요. 시인은 이미 그 길에서 온몸으로 살며 시로써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시인은 ‘낯설지 않은 도시를 떠돌다 / 낯선 고향’(「귀향」) 같은 바닷가에 닻을 내렸습니다. 그곳에서 점점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을 멀리한 채 바닷가 움막에 살며 바닷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치망에 걸린 물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기도 하고, 숭어 한 지게 짊어지고 맨발로 지구를 신기도 하며, 그물에 줄줄이 딸려 오는 주꾸미를 배 위로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러한 생활 속에서 뻘밭의 ‘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뻘밭」)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내 뻘의 말랑말랑한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다다릅니다. 기실 그곳에 생명의 길이 있었습니다.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 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무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그렇지만 ‘들이 아닌 강이 아닌 산이 아닌 / 식당에서나 음식물을 만나 / 죽은 고기를 씹고 / 똥을 내리는 물소리나 들으며’(「귀향」) 사는 도시는 이 시대의 대세입니다. ‘더운 곳에 물을 대며 / 살아가던 농촌에도 / 딱딱한 건물들이 들어’ (「감촉여행」)서 도시를 흉내냅니다. 그러니 도시에서 볼 때 농촌이나 어촌 같은 시골은 어서 빨리 도시화가 이루어져야 할 도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럴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골은 도시의 그림자이고, ‘검은 그림자들이 줄줄이 서 있’(「불 탄 산」)는 불 탄 산 같은 곳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 죽음의 그림자일 뿐’(「질긴 그림자」)이고, ‘그림자가 그림자 먹어 치우는 것’(「고향」)이 우리 인생일지도 모릅니다. 점점 딱딱해지는 세상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이 여자 몸 속에 아이 하나 못 심고 마흔을 넘긴 시인이 거대한 부드러움 속에 있기에 더욱 그걸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세상을 보는 눈은 흐릿하거나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더러운 호수가 하얀 연꽃을 피우듯 시인은 그림자로부터 일찍이 보지 못한 세상을 꽃피웁니다.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에 색깔의 수를 놓고, 어머니 휜 허리 그림자를 우둑둑 펴게 하며,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를 따뜻하게 하고, 마음의 그림자에 평평한 세상을 세웁니다. 그 어느 세상보다 값지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바닷가 사람들과 더불어 가난하게 살며 뻘에서 피워낸 아름다운 세상이기에 감정의 동요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하여 ‘함민복은 우리 시대의 축복이다’는 후배 시인 박형준의 찬사는 너무 평이한 수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림자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2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2 댓글 0
뻘 밭을 꾸린 시인의 보따리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아**르 | 2008.05.11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발가락 사이사이 빈 틈 없이 메우다 빠져나가는 부드러움. 장딴지를 단단히 잡아주는 힘. 찰흙을 만지작거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촉.   함민복 시인의 표현처럼 '맨발로 지구를 신(詩 <숭어 한 지게 짊어지고> 부분)'을 수 있는 데가 바로 뻘이다. 물구나무서면 지구를 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우스갯소리에 가깝지만, 뻘에 두 발을 묻으면 거;
리뷰제목
 

  발가락 사이사이 빈 틈 없이 메우다 빠져나가는 부드러움. 장딴지를 단단히 잡아주는 힘. 찰흙을 만지작거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촉.

  함민복 시인의 표현처럼 '맨발로 지구를 신(詩 <숭어 한 지게 짊어지고> 부분)'을 수 있는 데가 바로 뻘이다. 물구나무서면 지구를 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우스갯소리에 가깝지만, 뻘에 두 발을 묻으면 거대한 신발을 신은 꼴이라는 시인의 생각은 순수한 상상력이다.

  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을 구입한 이유를 묻는다면, 오직 한 가지 함민복이란 이름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가 추구하는 시세계를 동조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시 <눈물은 왜 짠가>의 여운이 끝이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머릿속에서 한참을 굴려야 하는 모호한 시어가 아닌, 일상어로 이야기하듯 써내려간 시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직구( 直球 )로 가슴에 와 닿았다. 오래 전에 일으킨 파문은 아직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설렁탕 투가리의 부딪침,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시인은 급속도로 변모해가는 도시 문명을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詩 <옥탑방> 부분)'이다. '메주 띄울 못 하나 박을 수 없는 / 쇠기둥 콘크리트 벽안에서(詩 <감촉여행> 부분)' 살고 있다. 밤을 밝히는 네온사인 십자가를 바라보며 '비바람에 썩는 (詩 <그리운 나무 십자가> 부분) 나무 십자가를 그리워한다.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詩 <김포평야> 부분)'. 이처럼 수직은 도시를 상징한다. 빌딩, 빌딩 속의 기둥, 엘리베이터, 신호등, 골목골목 전봇대까지 수직을 향한다.

  이와 상반되는 수평, 자연을 살펴보자. '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 제 몸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지은 놈 하나 없(詩 <뻘 밭> 부분)'는 뻘이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詩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부분)' 곳이다. '흔들리는 길 위에서 길은 더 흔들(詩 <푸르고 짠 길> 부분)'리는 바다가 되기도 하는 뻘.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詩 <뻘> 부분)'주는 뻘.

  열 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내가 처음으로 뻘이라고 부르는 곳을 가본 적은. 정오에 도착한 만경강 하구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손등으로 차양을 만들어 멀리 내려다보면 바다로 짐작되는 부근이 소리 없이 넘실대고 있었다. 반바지로 갈아입은 선발대 몇은 성급히 뻘에 빠져 들어갔고, 미처 준비를 못한 사람들은 긴바지를 높이 걷어올렸다. 내 또래 아이들은 속옷 차림으로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서는데, 나는 성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뻘과 늪이 사촌지간으로 여겨졌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머리끝까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죽어도 친구들에게 겁쟁이가 되기 싫었던 나는 울상인 채 발을 내딛었으나, 머잖아 뻘과 늪은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임을 깨달았고, 1초 대기조였던 눈물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나는 뻘에서 유영하는 갯지렁이와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은 뱀을 보면 놀라곤 하는데, '사람들을 볼 때마다 /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詩 <소스라치다> 부분)'은 생각하지 않는다.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 몸 낮추어 //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詩 <물> 부분)' 물을 '하늘로 올라가는 수증기의 길에 속도를 가하고 / 땅으로 내려오는 비의 길을 어지럽혀(詩 <큰 물> 부분)' 폭우로 쏟아지게 만든다. 우리가 물길을 막아놓고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라고 말한다. '소리에 어른이신 저 큰 말씀 / 무슨 뜻인지 모르겠(詩 <천둥소리> 부분)'다고 말한다.

  이 시집은 자연의 구성원이 아니라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인류에 대한 경고 메시지이다. 인류는 드넓은 뻘을 육지로 만들어 수직 세계를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나, 자연은 수직을 수평으로 뒤엎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왜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하려 애쓰는가. 딱딱하게 발기만 할 때가 아니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詩 <감나무> 부분)'는 작품으로 채워진, '수만 번 꾸렸다 폈다 했을(詩 <보따리> 부분)' 시인의 보따리. 내 보따리인 양 쉽게 풀어놓았으나, 쉽게 묶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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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힘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2019.11.25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책 제목이 말랑말랑한 힘인데 “힘”이라고 하면 세고, 강하고, 단단한 것들이 생각나는데 “말랑말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세지 않고, 단단하지 않은 것들이 생각나서 책 제목이 서로 반대되는 말인 것에 흥미를 가지고 보게 되었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말랑말랑한 것이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함민복 작가는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단지 무료라는 이유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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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말랑말랑한 힘인데 “힘”이라고 하면 세고, 강하고, 단단한 것들이 생각나는데 “말랑말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세지 않고, 단단하지 않은 것들이 생각나서 책 제목이 서로 반대되는 말인 것에 흥미를 가지고 보게 되었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말랑말랑한 것이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함민복 작가는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단지 무료라는 이유로 공고에 들어갔고 졸업 후 원자력 발전소에 입사했지만 기계와의 대면이 너무 힘들어 4년 만에 그만둔 후 서울 예술대학 문예 창작과에 입학 후 2학년 때인 1988년에 <성선설>등을 <<세계의 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6년 강화에 정착한 후 시집 <말랑말랑한 힘>과 에세이집 <미안한 마음>,<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를 펴냈다. 이중 <말랑말랑한 힘>은 출간하여 제24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함민복 시인 특유의 유머 감각과 시인의 작품에 대체로 그의 삶이 시에 녹아있다. 구체적인 일상을 소재로 했고 대체로 일상에서 체험한 것들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독자들에게 전달해준다. 언어를 다루는 기법이 난해하지 않아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나는 앞만 보고 힘겹게 살아간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함민복의 시는 대체로 자신의 생애를 바탕으로 쓰였는데 함민복의 생애도 결코 순탄치 않았고, 함민복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시를 통해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긴 시와 짧은 시가 고루 분포되어 있어서 시를 읽어나가는 속도가 정돈될 뿐만 아니라 긴 시만 나오면 지루할 수 있는데 지루할 틈 없이 짧은 시가 나오기 때문에 이 책에 더 빠져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시집에 깊게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지금의 딱딱한 도시에서 벗어나 예전의 말랑말랑한 도시의 정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이 시집 안에는 함민복의 어릴적 이야기들도 담겨있기 때문에 그 시절의 정을 느껴볼 수 있다. 이 시집에서 인상깊게 본 구절들이 있는데 ‘딱딱한 것들을 부수고 더운 곳에 물을 대면 살아가던 농촌도 딱딱한 건물들이 들어선다’라는 구절이다. 예전엔 공동체 의식이 높아 주변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냈는데 지금 높은 건물들이 들어선 곳에서는 서로 딱딱하게 대하는 모습들이 생각 나서 인상 깊었다. 점점 딱딱한 건물들만 들어서는 모습이 조금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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