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이 닮았다 p. 32~34 M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반년쯤 자랐습니다. 어떤 날 M은 그 아이를 몸소 안고 병을 뵈러 나한테 왔습니다. 기관지가 조금 상하였습니다. 약을 받아가지고도 그냥 좀 앉아 있던 M은 묻지도 않는 말을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놈이 꼭 제 증조부님을 닮았다거든.” “그래?” 나는 그의 말에 적지 않은 흥미를 느끼면서 이렇게 응했습니다. 내 눈으로 보자면, 그 어린애와 M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바인데, 그 애가 M의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은 기이하므로…… 어린애의 진편과 외편의 근친近親에서 아무도 비슷한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M의 친척은, 하릴없이 예전의 죽은 조상을 들추어낸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애에게, 커다란 의혹과 그보다 더 커다란 희망(의혹이 오해였던 것을 바라는)은 M으로 하여금 손쉽게 그 말을 믿게 한 모양이었습니다. 적어도 신뢰하려고 마음먹게 한 모양이었습니다. 내가 자기의 말에 흥미를 가지는 것을 본 M은, 잠시 주저하다가 그가 예비하였던 둘쨋말을 마침내 꺼내었습니다. “게다가 날 닮은 데도 있어.” “어디?” “이보게.” M은 어린애를 왼편 팔로 가만히 옮겨서 붙안으면서, 오른손으로는 제 양말을 벗었습니다. “내 발가락 보게. 내 발가락은 남의 발가락과 달라서 가운데 발가락이 그중 길어. 쉽지 않은 발가락이야. 한데―.” M은 강보를 들치고 어린애의 발을 가만히 꺼내어놓았습니다. “이놈의 발가락 보게. 꼭 내 발가락 아닌가? 닮았거든…….” M은 열심으로, 찬성을 구하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닮은 곳을 찾아보았기에 발가락 닮은 것을 찾아내었겠습니까. 나는 M의 마음과 노력에 눈물겨워졌습니다. 커다란 의혹 가운데서, 그 의혹을 어떻게 하여서든 삭여보려는 M의 노력은, 인생의 가장 요절할 비극이었습니다. M이 보라고 내어놓은 어린애의 발가락은 안 보고 오히려 얼굴만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나는 마침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발가락뿐 아니라, 얼굴도 닮은 데가 있네.” 그리고 나의 얼굴로 날아오는 (의혹과 희망이 섞인) 그의 눈을 피하면서 돌아앉았습니다.
광화사 p. 186~188 화공은 처녀를 데리고 오막살이로 돌아왔다. 그의 마음은 너무도 긴장되고 또한 기뻐서 저녁도 짓기 싫었다. 들어와 보매 벌써 여러 해를 멀리 달리기를 기다리는 족자의 여인의 몸집조차 흔연히 화공을 맞는 듯하였다. “자, 거기 앉어라.” 수년간 화공을 힐책하던 머리 없는 그림이 화공의 앞에 펴졌다. 단청도 준비되었다. 터질 듯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폭 앞에 자리를 잡은 화공은 빛이 비치도록 남향하여 처녀를 앉히고 손으로는 붓을 적시며 이야기를 꺼내었다. 벌써 황혼은 인제 얼마 남지 않은 오늘 해로써 숙망을 달하려 하는 것이었다. 십 년간을 벼르기만 하면서 착수를 못 하기 때문에 저축되었던 화공의 힘은 손으로 모였다. “그러구― 알겠지?” 눈으로는 처녀의 얼굴을 보며 입으로는 용궁 이야기를 하며 손은 번개같이 붓을 둘렀다. “용궁에는 여의주如意珠라는 구슬이 있구나. 이 여의주라는 구슬은 마음에 있는 바는 다 달할 수 있는 보물로서 그 구슬을 네 눈 위에 한번 굴리면 너도 광명한 일월을 보게 된다.” “네? 그런 구슬이 있습니까?” “있구말구. 네가 내 말을 잘 듣고 있기만 하면 수일 내로 너를 데리고 용궁에 가서 여의주를 빌려서 네 눈도 고쳐주마.” “그러면 저도 광명한 일월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광명한 일월, 무지개라는 칠색이 영롱한 기묘한 것, 아름다운 수풀, 유수한 골짜기 무엇인들 못 보랴.” “아이구, 어서 그 여의주를 구해서.” 아아. 놀라운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화공은 처녀의 얼굴에 나타나 넘치는 이 놀라운 표정을 하나도 잃지 않고 화폭 위에 옮겼다. 황혼은 어느덧 밤으로 변하였다. 이때는 그림의 여인에게는 단지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을 뿐 그 밖의 것은 죄 완성이 되었다. 동자까지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생명을 좌우할 눈동자를 그리기에는 날은 너무도 어두웠다.
자연과학의 근거 위에 심리적 갈등을 그린 작품 〈발가락이 닮았다〉는 혈육을 갖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 자신을 기만하면서까지 파멸에서 자기를 구하려는 생에 대한 의지 등 무력한 인간의 숙명을 그린 작품이다. 민족의식을 자연주의적 경향으로 쓴 〈붉은 산〉은 일제 침략기에 수난받는 민족과 조국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잘 나타난 역작으로 만주에 이민해 가 있는 동포들의 촌락을 중심으로 '삵'이라는 주인공이 희생을 무릅쓰고 동포를 위해 투쟁한 영웅적인 행동을 그렸다. 김동인의 예술지상주의 경향이 잘 나타난 대표작 〈광화사〉는 추한 몰골로 태어난 화공이 천하절색인 소경 처녀를 만나 일생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미인도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인간의 욕정으로 인해 좌절하고 마는 화공 솔거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반영하여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곰네〉는 억척같이 삶을 일구어 오다 도박에 빠진 남편 때문에 전 재산을 날린 뒤 절망에 빠지면서도 의지가지없는 아이를 거두어 먹이면서 아이를 키우기 위한 새 희망을 찾는 주인공을 내세우는데, 이 소설을 비롯해 수필에 가까운 자전소설인 〈몽상록〉과 〈가신 어머님〉 두 편이 거의 동일한 내용과 구조를 취하면서, 전자가 병든 어머니의 임종까지를 묘사하고 있다면 후자는 이미 떠나간 어머니를 간절한 그리움으로 회상한다. 이 소설들을 통해 독자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김동인의 소설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으며, 그 어머니와의 대척점에 서 있는 각종 여성에 대한 부정적 묘사의 기저에 깔린 감정을 파악하게 된다. 〈김연실전〉을 비롯한 3부작 〈선구녀〉 〈집주릅〉이 바로 이러한 여성들의 비행과 일탈을 묘사한 소설인데, 그의 작품 세계에 ‘어머니 아닌 여성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경멸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송 첨지〉를 비롯한 〈학병 수첩〉 〈김덕수〉 〈반역자〉 〈망국인기〉 등 후기 단편들에서는 작가의 친일 행적에 대한 자기 합리화 또는 심약한 작가의 자기 분열마저 느낄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고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인류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리고 싶어 하는 〈송 첨지〉에서 보이는 화자의 의식은 작가의 친일 행적에 대한 자기 합리화처럼 보이며, 〈학병 수첩〉에서는 이 같은 합리화가 더욱 극대화되어, 일본에 동조하기 싫었지만 모종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병이 되었다는 자기 고백이 드러난다. 〈망국인기〉 등 후기 단편들은 항상 자존에 차 있던 김동인이 식민지 치하의 생활을 속죄의 관점에서 쓴 소설이란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