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유령 p. 82 어슴푸레한 저녁, 몇 리를 걸어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인지경 산골짝 비탈길, 여우의 밤이 다 되어버린 해골덩이가 똘똘 구르는 무덤 옆, 혹은 비가 축축이 뿌리는 버덩의 다 쓰러져가는 물레방앗간, 또 혹은 몇 백 년이나 묵은 듯한 우중충한 늪가! 거기에 흔히 나타나는 유령이 적어도 문명의 도시인 서울에 오히려 꺼림 없이 나타나고 또 서울이 나날이 커가고 번창하여가면 갈수록 유령도 거기에 정비례하여 점점 늘어가니 이게 무슨 뼈저린 현상이냐! 그리고 그 얼마나 비논리적 마술적 알지 못할 사실이냐! 맹랑하고도 기막힌 일이다. 두말할 것 없이 이런 비논리적 유령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유령을 늘어가지 못하게 하고, 아니 근본적으로 생기지 못하게 할 것인가? 현명한 독자여! 무엇을 주저하는가. 이 중하고도 큰 문제는 독자의 자각과 지혜와 힘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깨뜨려진 홍등 p. 166~167 “들어보시오! 당신들도 피가 있거든 들어보시오! 우리는 사람이 아니오. 우리가 사람 같은 대접을 받아온 줄 아오. 개나 도야지보다도 더 천대를 받아왔소. 당신네들이 우리의 몸을 살 때에 한 번이나 우리를 불쌍히 여겨본 적이 있었소. 우리는 개만도 못하고 도야지만도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먹어봤나 놀고 싶을 때 놀아봤나 앓을 때에 미음 한술 약 한 모금 얻어먹었나. 처음 들어오면 매질과 눈물에 세상이 어둡고 계약한 기한이 지나도 주인놈이 내놓기를 하나, 한 방울이라도 더 우려내려고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꼭 잡고 내놓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구 물건이다. 애초에 우리가 이리로 넘어올 때에 계약인지 무엇인지 해가지고 우리를 팔아먹은 놈 누구며, 지금 우리의 버는 돈을 한 푼 한 푼 다 빨아내는 놈은 누군가. 우리는 그놈들을 위해서 피를 짜내고 살을 말리우는 물건이다. 부모를 버리고 동기를 잃고 고향을 떠나 개나 도야지만도 못한 천대를 받게 한 것은 누구인가, 누구인가.” 그는 흥분이 되어서 그도 모르게 정신없이 이렇게 외쳤다. 며칠 전 부영이에게서 들어두었던 말이 이제 그의 입에서 순서는 뒤바뀌었을망정 마치 제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같이 한 마디 한 마디 뒤를 이어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장황은 하나 그는 이것을 다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석류 p. 611~612 갑남이는 가난하였다. 점심을 굶는 때가 많았다. 이상스러운 것은 그런 때에는 애순이도 역시 점심을 굶는 것이었다. 애순이는 결코 갑남이같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점심이 없을 리는 없었다. 수상히 여겨 하루 재희는 점심시간이 끝나 교실이 비었을 때 은밀히 애순이의 책상 속을 살펴보았다. 놀란 것은 너볏이 점심을 싸 가지고 온 것이었다. 다음 날 갑남이가 점심을 먹을 때에 애순이도 먹었으나 다음 날 갑남이가 굶을 때에는 애순이도 굶었다. 물론 책상 속에는 점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그것을 발견하였을 때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한 느낌이 재희의 가슴을 쳤다. 한편 닿아서는 안 될 성스러운 것에 손을 닿은 것 같아서 송구스러운 느낌이 마음을 죄었다. 가만히 애순이를 불러 이유를 들었을 때 문득 가슴이 저리고 눈시울이 더워졌다. “갑남이가 안 먹으면 먹구 싶지 않아요.” 재희는 그날 돌아오던 길로 이불 속에서 혼자 흠뻑 울었다. 그날같이 산 보람을 느낀 때도 적었다. 그 후로는 갑남이를 꾸짖기는커녕 두 아이를 똑같이 곱절 사랑하게 되었다. 자기들의 옛날이 그지없이 그리웠다. 산란한 심사에 몸이 유난히도 고달팠다. 재희는 학교를 쉬고 자리에 눕는 날이 많았다. 소설가로서의 준보의 이름을 발견한 것은 커다란 놀람이었다. 무지개를 본 듯이 마음이 뛰놀았으나 옛날을 우러러보는 동안에 정신이 무척 피곤도 하였다. 눈초리에 눈물 자취의 어지러운 지도를 그린 채 재희는 눈을 떴다.
〈도시와 유령〉에서 주인공 나는 어느 날 밤 문명을 자랑하는 서울에서 유령을 목격하고 깜짝 놀란다. 도깨비장난 같은 유령의 출현에 반은 호기심에 유령의 진면모를 밝히기 위해 나서는데 함께 일하는 박 서방은 그런 유령이 밤이면 서울 시내 여러 곳에 나타나 시글시글하다며 의미심장한 말과 뜻있는 웃음을 보인다. 결국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지만 그것은 쓰디쓴 도시의 전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알게 되면서 다시 한 번 독자 여러분의 행동을 촉구하고 나선다. 〈노령근해〉에서는 밀항선을 타고 러시아로 향하는 젊은 청년을 그린다. 배 위에서는 흰 탁자에 고기와 과일, 술병 들이 그득하고 상인들이 주식과 미두 이야기를 하며 화려한 파티를 벌이지만 쇠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저 아래 암흑의 공간 석탄 창고 안에는 굶주리고 외로움에 허덕이며 하루하루 사투를 벌이는 한 청년이 숨어 있다. 청년은 러시아에 가기 위해 이 배에 몰래 올라탄 것이다. 배에서 보이로 일하는 동료의 도움으로 간간히 물과 음식을 먹으며 버티던 그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그곳에 도착하게 된다. 〈깨뜨려진 홍등〉은 청루에서 몸을 파는 여인들이 사람다운 삶을 위해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를 그린다. 한 명 한 명은 약하지만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닫고 마침내 청루 앞의 홍등을 깨뜨리며 본격적인 싸움에 나선다. 〈마작철학〉과 〈북국사신〉도 동반작가 경향의 작품들로 한 편은 노동자의 단결을 그리고 다른 편은 북국(러시아)에 간 청년이 동료에게 보내는 편지로 러시아 사람들의 모습과 그 안에서 피어난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오리온과 능금〉은 이효석 문학이 동반작가 경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기점이다. 아담과 이브에 나오는 유혹의 사과 같은 능금을 소재로 성적 모티프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후 나온 〈돈〉 〈수탉〉 〈분녀〉 〈들〉 등은 향토성과 성적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순수작품으로 〈돈〉에서는 돼지 접붙이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수탉〉에서는 번번이 싸움에 지는 못난 수탉의 모습에 자신의 상황을 겹쳐 보는 주인공 을손의 심정이 그려진다. 〈분녀〉에서는 결혼식을 올린 적도 없고 연애마저 한 적이 없는 분녀가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여러 남자를 만나게 되는 과정이 나온다. 분녀의 일생은 인간사회의 눈으로 보면 서글프기 그지없지만 그 자체로만 보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노는 동물들의 모습으로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들〉 역시 마찬가지다. 들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한껏 노래하며 자연으로 돌아갔을 때의 자유로움을 이야기한다. 〈산〉에서는 마침내 마을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사는 삶을 택한 주인공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하늘의 별을 세며 잠드는 모습이 목가적으로 그려진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문명보다는 자연 속에서 사는 인간의 모습을 화려한 시적 문체로 긍정적으로 그린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