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에서 여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과격해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출세들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는, 여자 자신들이 얼마나 기막히게 낙후된 여성인권 후진국에서 살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운동도 결국은 권력을 나눠갖자는 운동이다. 우리도 권력 좀 가져보자는 것이다...권력욕은 불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마이너리티의 경우라면, 그런 소수자에게 권력행위는 인권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 p.164
이 시대는 결코 여자들에게 우호적인 시대가 아니다. 그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회를 가로지르며 내가 단 하나의 비즈니스라도 성공시킬 수 있었다면, 그건 전적으로 집요한 승부근성 덕분이다. 그건 날 아주 피곤하게 만드는 근성이고 동시에 강하고 씩씩하게 만드는 근성이다. 그래서 늘 근성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보수나 지위나 그런 건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보니까 그런 게 내 뒤에 따라오고 있었다.
--- p.81
우리는 고교시절부터 친구인데 나는 이따금 그를, '굳센 금순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목표를 향해 씩씩하고, 쟁취한 것에 대해 내숭없이 자랑하는 그의 태도를 나는 좋아한다. 더불어 조선희 스타일이 21세기를 사는 여성들의 모델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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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얘기한 것처럼, 내가 태어난가족은 비합리적이고 문제투성이였지만,나는 그곳에서내호주머니에 담아 평생을 가지고 갈 만큼의아양분을얻었다.그리고사람에대한 전폭적인 애정이존재할 수 있음을 내가 무의식으로부터깊이 이해하고 있는것도,거기서배운것이다.
--- p.116
문제의 환송회는 출판국의 다른 두 매체, 한겨레21과 케이블TV가이드 편집장이 만들어준 자리였다. 한겨레21 김종구 편집장은 나보다 세살 많고 학번도 1년 빠르지만 연합통신 3년 후배였는데, 그가 기자생활을 접는 나를 만감이 교차하도록 만든 주범이었다. 그는 연합통신 5기로 입사했고 나는 2기였는데, 우리 동기들이 마련한 5기 신입생 환영회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비원 앞 와룡동이라는 음식점 2층이었다.
그는 반듯하게 생긴 '청년'이었는데 그 썰렁했던 시절의 통신사에서 운동권 출신을 만나니 마치 객지에서 고향 까마귀 만난 듯했다. 그가 나이는 더 많았지만 내게 늘 존경심을 참을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선배'라고 불렀고, 나는 '화장실은 이리로 가고 수돗가는 저리로 가며 콧물은 반드시 손수건으로 닦아야 한다'는 식으로 선배 노릇 잘 하려 애썼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나고 우리는 한겨레신문 출판국에서 각각 한겨레21 편집장과 씨네21편집장으로 다시 만났다. 내가 문화부 기자를 실컷 하고 온 동안 그는 사회부에서 경찰반장과 검찰반장, 정치부에서 정당과 청와대 출입을 하며 이른바 '뉴스'부서의 엘리트 코스를 돌고 왔다.
나는 문화부 기자를 오래 했으니 문학이나 영화에도 조예가 깊고 입을 열 때마다 교양미도 뚝뚝 떨어지지만, 그가 한국사회를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로 격파하면서 통찰력을 과시할 때 나는 그의 입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속으로 '녀석, 많이 컸군.' 하면서 말이다. 그러고선,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은퇴한 게 아니라 조퇴했구나.'
--- p.149-150
무엇이 성공인가. ..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의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p.78-79
모든 가치는 양면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국가와 사회와 가족을 유지시키기 위한 건전한 주류 이데올로기는 그 나름의 미덕이 있는 만큼, 위풍당당한 포장 안쪽에 가증스러움과 위선이 자라나게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악마성과 파괴성으로 똘똘 뭉친 비주류의 목소리는 그 위악적인 표정 뒤에 진실과 고통스러움을 감추고 있게 마련이다. <거짓말>의 섹스 장면은 대다수 관객에게 감정이입보다는 이질감을 부추길 것이다. 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누구나 못돼먹었다고 손가락질하는 대상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 대개 치명적인 위험은 모두가 옳다고 믿는 어떤 것에서 나오기 십상이다.
--- p.257
먹고 입고 가방 싸는 일을 아이들에게 시켜보려고 해도, 잠이 덜 깬 아이들은 마치 껌처럼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내가 다 일일이 챙기게 된다. 한비야는 세계 여행기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대신해 주는 건 독이다.' 라는 어떤 외국인의 말을 전했다. '난 만날 독을 먹이고 있군'
--- p.133
나의 하루는 두 시간의 장애물 경기로 시작한다. 아침 7시 반쯤 일어나서 큰 딸을 먹이고 입히고 가방 싸서 8시 반쯤 학교 보낸다. 그 다음은 둘째를 깨워서 역시 먹이고 입히고 가방 싸서 9시 반쯤 유치원에 데려다준다. 먹고 입고 가방 싸는 일을 아이들에게 시켜보려고 해도, 잠이 덜 깬 아이들은 껌처럼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내가 다 일일이 챙기게 된다. 한비야는 세계여행기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대신해 주는 건 독이다"라는 어떤 외국인의 말을 전했다. '난 만날 독을 먹이고 있군.' 게다가 아이가 둘이면 1년에 3~4개월 정도는 교대로 병원에 다니고 늘 약을 먹여야 하고, 문방구에 들러 준비물도 챙겨야 하며, 아이가 학교에 지각하겠다 싶으면 차에 태워서 데려다준다.
그런데 이렇게 아침부터 산전수전 다 겪고 10시에 회사에 출근하면 대개 사무실엔 서무가 혼자 앉아 있을 때가 태반이다. 씨네21엔 미혼의 남녀들과 할랑한 유부남들뿐이라 대개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옷 입고 나오는 게 고작일 터인데, 대체로 10시 반~11시 돼서 느긋하게들 출근하곤 한다. 물론 이들이 대체로 야행성이라 밤샘을 밥 먹듯 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가 아침부터 <인디애나 존스> 찍다시피 하고 나와 앉아 있는 걸 생각하면 신경질이 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느지막히 출근하는 당번에게 호통친다.
"너 당번 맞아? 지금 몇 시야?"
---p.133
- 내용은 다르겠지만, 누구나 살면서 진퇴유곡의 절망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자신이 진흙뻘을 기는 거북이나 변기 속에 빨려들어가는 귀뚜라미 같다고 느껴지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나도 사람에게 상처받으면 그것을 이기는 방법을 모른다. 다만 시간의 치유능력을 믿을 뿐이다. 또한 내 해법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 문제국면을 맞닥뜨렸을 때 용기를 잃지 않는 방법을 모른다. 그럴때 역시 시간이 문제를 바꿔놓으리라 기대할 뿐이다. (32)
-존뎀버의 노래처럼 인생도 부부관계도 'Some days are iamond, some days are stone'인 것이다. 부부도 각기 자기 인생이 있고 그래서 각기 다른 사이클을 갖게 마련이다. 바로 한 집안에서, 상대방이 지옥을 헤매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할 때도 있다. 그런 때야말로, 부부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시기이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 일종의 '품앗이'가 있다. 그리고 어려울때 곁에 있어 주었다는 기억이, 부부 사이를 지탱하는 힘이 된어주기도 한다. (100)
--- p.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