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두 개의 모순된 길을 간다. 카리스마 넘치는 대중 예언가 세례 요한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중의 기대를 ‘배신’하는 언행을 시작한 것이다. 이 배신이란, 사람들이 메시아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로부터의 탈주를 의미한다. 예수는 메시아가 지역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에 한정되거나 좁은 의미의 해방만을 일구고 눈앞에 놓인 대중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수의 그러한 언행에서 드러나는 파격성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외면받은 것은 아니다. 예수는 그만의 불온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빠르게 사로잡으며,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 p.35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는 백부장 하인의 치유를 통해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믿음을 강조한다. 백부장은 점령군에 속한 군사 출신으로 유대인들이 꺼리는 이방인임에도 백부장은 자기를 완전히 낮추어 겸손하게 고백한다. …… 한편, 급진적 성서 신학자 테드 제닝스는 백부장의 하인으로 번역 된 하인이라는 희랍어 파이스παι?가 애인이라는 뜻을 가진 에라스테스εραστε?에서 유래되었다며, 이는 곧 동성에 대한 사랑을 용인하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에라스테스는 헬레니즘 세계에서의 동성애적 관계를 의미하는 용어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제닝스는 예수가 백부장이 사랑하는 대상을 정죄하거나 멀리하지 않고 인간애적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치유까지 일으켰다는 점, 거기에 백부장의 믿음에 놀라움까지 자아냈다는 점에서, 예수 역시 인간의 사랑에는 이성, 동성애 등의 젠더 구분이 있을 수 없음을 피력한 일화라고 주장한다.
--- p.92-93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일화에는 강도를 만나 크게 상처 입은 자가 등장한다. 사제와 레위인은 그 자를 모르는 척하고 지나간다. 사제와 레위인은 당대 특권층에 해당되는 고위 관리직이었다. 이들은 명예와 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자부심 또한 막강했다. 하지만 예수의 눈에는 약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음에도 외면한, 무정한 존재일 뿐이다. 예수에게 그들은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율법 파괴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충실히 하고 있으니 강도에게 당한 자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직무에 충실한들, 강도를 만난 것처럼 험하고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진짜 이웃은 죽어가고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강도를 만난 자에게 진정한 선행과 도움을 베푼 자는 누구인가? 이웃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은 모두 서로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
--- p.169-170
보수 신학자 박윤선은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의 교훈을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보여준다고 이해한다. 특히 예수가 우주를 통치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그대로 수혈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증거가 되는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 반면 급진적 진보 신학자 존 밀턴 잉거는 오천 명을 먹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잉거는 이 기적을 기적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근원적인 이기심이 허물어진 나눔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 잉거는 급식 기적 이야기를 오늘날 극심한 식량 불균형으로 인해 일부 극빈국가에서는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넘치지만 선진국에서는 영양 과잉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부의 재분배 담론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 p.209
예수의 언행은 언제나 그러했듯, 제자들의 기대와 통념에서 벗어난다. 예수는 더 급진적이고 과격해졌다. 이혼 논쟁에서 보인 파격적인 언행도 그러했고, 투표권도 없고 공적 자리에서 말하는 것조차 인정받지 못하던 어린아이를 두둔하는 언행을 했을 때도 그러했지만, 당대 존경받던 부자 청년에게 면박을 주며 돌려세웠을 때 제자들과 추종 세력이 느낀 당혹스러움은 매우 컸다.
분명 예수는 당대 유대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독특한 메시아적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떤 자리에도 안주하지 않는, 그래서 자신을 반대하는 이도 많았던 예수가 어떻게 오늘날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종교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과연 예수의 언행에서 그 비밀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까?
--- p.304-305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이해하는 예수의 부활, 특히 마가복음에서의 예수 부활은 왕의 부활과 속죄의 완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때의 왕은 메시아, 즉 하나님 아들 됨의 성립에 대한 예표이다. 칼뱅은 예수의 십자가가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의 시작이라면,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의 완성이라 본다. 다시 말해 예수의 부활을 모든 인류가 타락하여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고통과 슬픔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믿음의 사건으로 이해한 셈이다. …… 이와 다른 입장을 가진 진보 신학자들도 있다. 부활이 사실이든 아니든, 부활에 담긴 의미의 중요성을 인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그들은 마가복음에서의 예수 부활을 갈릴리와 연관 지어 고찰한다. 예수가 부활한 뒤 갈릴리로 돌아간 이후 갈릴리가 비천하고 소외된 장소가 아니라 전복과 혁명의 새 역사를 쓰기 위한 장소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민중의 해방을 향한 갈망에 대한 응답으로 보며, 갈릴리가 과거에는 소외되고 아집이 들끓었을지라도 새 역사를 위한 운동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472-473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가 사람의 아들로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사랑인 하나님이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들어온 목적은 누군가를 꾸짖고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초월적인 신비도 아니다. 그 역시 사랑이었다. 이 사랑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마음, 함께하는 마음이다. 서로의 숨결을 느끼고 주고받으며 내가 살아 있음을, 그리고 네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마음. 예수는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예수의 언행을 통해 우리는 이 한 가지를 마음에 품을 수 있다. 사랑하는 것, 그것도 끝까지 사랑하는 것. 그것은 오직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붙잡고 살아가는 철저한 사랑의 연대이다. 예수는 이렇게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 안에 함께하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토록. 사랑으로, 그 사랑으로 말이다.
--- p.486-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