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는 자신을 지우고 침묵하며, 세상 체험에 몰두한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방랑이란 없다.
--- p.10
방랑이라는 모험은 바로 그 시간을 현재진행형으로 온전히 살게 해준다. 내게는 ‘현재’가 문제였다.
--- p.16
특별한 순간, 결정적 순간, 예외적 순간 같은 것이 어디 있을까? 일상의 순간들이 있을 뿐인데.
--- p.22
나는 무언가 끝없이 이어지는 인상을 받는 것을 찍었다. 대개, 사진은 항상 영원한 순간이라 생각하기들 좋아할 텐데 이것과 정반대다. 어떤 ‘아이콘’, 우상 같은 것, 감마 통신사에서 일하던 시절에 떠들곤 했던 한 장의 프라고나르 그림 같은 것, 강렬한 사진, 완벽한 사진, 흠잡을 데 없는 사진, 그 이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거울 속에 비친 증거 같은 것, 이런 것과 정반대다.
--- p.34
방랑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가능한 오래 ‘현재’를 살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이야말로 가장 긍정적 성과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 자신을 볼 수 있고, 나 자신을 수긍한다.
--- p.40
《방랑》작업에서, 나는 제한된 방법을 택했다. 화면의 규격과 사진기, 광각렌즈, 흑백사진으로… 너무 야박한 제한을 둔 것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와 사람과 사물과 나의 관계를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56
《방랑》에 주제는 없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지도 부자를 고발하지도 않는다. 나는 구름을 찍고 땅바닥을 찍는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또 너무너무 잘 보고 있다. 나는 그렇게 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보아야 했다. 《방랑》은 내가 난생 처음 주제와 줄거리에서 벗어난 작업일 것이다.
--- p.60-61
내 작업은 ‘거울’과 동시에 ‘창문’ 같은 것이다. ‘창문’ 같은 면이 바로 통로다. ‘거울’ 같은 면은 내 자리를 지시한다는 사실에 있다.
--- p.92
“내가 증인이다. 내가 가져온 것을 좀 보시지. 내 증언은 진실이고, 나는 진실했다. 위험을 무릅쓰며 전쟁터를 누비고, 증언을 가져왔다.” 나는 이런 훔쳐보기에서 나온 이야기, 보도사진의 증언과 오랫동안 싸울 수밖에 없었다.
--- p.110
나는 고발하러 찾아다니지 않는다. 비난하려고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증명하려고 찾아다니지도 않는다. 여러분에게 내가 보는 방식을 보여준다. 내게 주어진 한때에 내가 보는 세계, 그 세계의 일부를.
--- p.112
사막에서, 걷고 생각하고 하다 보면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보게 된다.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빗나간 것들이다.
--- p.124
방랑의 깊은 뜻은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한곳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는다. 방랑자는 지나가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제 것으로 삼지 않는다. 훔치지도 않는다.
--- p.130
방랑을 하다 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간다.
--- p.132
나는 방랑하면서 너무나 많은 은밀한 것과 마주쳤다. 그 사진 속에, 그 빛과, 그 땅과 하늘 속에 있는 것들이다.
--- p.173
나는 화면의 바깥을 암시하는 수법도, ‘거울’과 ‘창문’도 버린다. 죄의식도 주제도 순간도 인정도, ‘퍼포먼스’처럼 사진가를 혼란스럽게 흔드는 모든 것을 버린다. 사실과 덧없는 것에 매달려 작업한다는 복잡한 기분, 죄의식과 후회 또는 너무 뒤늦은 원망, 즉 이것저것을 놓쳤다는 안타까움 말이다.
--- p.174-175
이렇게 나는 일관된 나 자신을 찾았다. 나 자신을 되찾은 듯해서 행복하다. 《방랑》 덕에 난생 처음, 나는 현재를 제대로 살았다.
--- p.175
지금 나는 시간을 넘어섰다는 기분이 든다. 사진가와 사진의 시간, 우리들 모두 예민했던 좋은 순간이라는 고전적 시간을 넘어섰다. 방랑으로, 유일하면서 또 보편적인 것을 내놓으려는 시간의 현상을 넘어섰다. 장소와 시간의 통일성 문제도 넘어섰다. 나는 애당초 방랑이 장소의 통일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서도 방랑할 수 있다. 항상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방랑할 수 있다. 반드시 움직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 p.176
《방랑》은 내가 지금 누구인지를 말한다. 내 있는 그대로, 나는 시간 속에서 또는 시간을 넘어서 과거에서 현재로 건너온다. 나는 현재의 중요성을 발견한다. 현재는 순간과 다르다. 내게는 현재가 절실하다. 지금 있는 그대로. 그것이 바로 나다. 이미지에서 나오는 신선한 이야기다. 자각自覺이다. 번민과 열등감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차분한 공간의 충만함이다. 나는 원래 나대로가 된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과거에 그랬던 바로 그대로. 나는 나 자신이다.
--- p.177
드파르동은 이 책을 준비하면서 방랑하는 동안 크게 변했다. “텅 빈 것을 채우려고” 안달하지 않았다. 사실상 원숙한 자기 미학에 도달했다. 현실 속에서, 현실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사진 작업을 하면서 그 실망스런 현실과 또 그것을 제대로 사진에 담았는지 의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을 벗어나려 괴로워했다. 현실과 자신에 대한 환멸을 끊임없이 뿌리치려고 계속 걸었다. [역자 후기]중
---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