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이 화장품을 팔자는 생각을 한 건 우연이었다. 하지만 우연을 기회로 잡았을 때 더 이상 우연이 아니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선물 상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물 상자 구성은 어떻게 할 것인지 판매 경로는 어디로 삼을지에 대해 말이다. 다솜과 유준은 계속 아이디어를 내놨고 여울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이야기도 모두 받아 적었다. 여울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들이 뭉실뭉실 떠올랐다. 세 명이 모였을 때 아이디어는 세 배가 아니라 훨씬 더 여러 배가 된다는 걸 아이들은 깨닫고 있었다. --- p.37
아이들이 준비한 시크릿 박스 500개가 모두 동이 났다. ‘십대를 위한 비밀 상자’ 콘셉트가 정확하게 먹혔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시크릿 박스가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판매를 시작한 지 2주 만에 완판이 되었다. --- p.54
“말도 안 된다고 한 건 네가 나처럼 되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가 아니야. 여울아, 돈은 말이다. 무엇을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절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만 가지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해.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꼼수를 부리거든. 내가 사업을 계속하는 이유도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물건을 파는 건 단순히 장사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거야. 시크릿 박스도 그렇지 않았니? 시크릿 박스가 인기를 얻은 건 단순히 화장품을 싸게 팔았기 때문이 아니란다.” 여울은 선우 여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시크릿 박스가 기존에 없는 제품을 개발하거나 발명한 건 아니다. 이미 있는 화장품을 ‘선물’,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판매한 것이다. 화장품은 이미 존재했지만 선물과 비밀의 의미를 부여한 건 여울과 아이들이다. 시크릿 박스는 그 자체로 새로운 상품이 되었다. “시크릿 박스 아이디어는 정말 좋았어.” --- p.62
“그래. 우리가 팔려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문화야.” 지후는 몇 차례 이 말을 강조했다. “십대들이 아이돌에 열광하고 팬덤을 만드는 건 사실 그 문화를 사는 거잖아.” 지후는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의 팬덤을 예로 들며 설명했다. 아이돌의 팬이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팬클럽이야말로 매우 주체적이다. 팬들은 팬클럽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멤버십을 발행하고 조직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자기들만의 문화를 만든다. 팬클럽 규칙이라든가 응원 방식 등등 각각의 팬클럽마다 특색이 있다. 팬들은 자발적으로 스타를 위한 선물 비용을 모으고 다른 팬클럽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한 선물 목록을 고민한다. 과도한 조공 문화가 비판받자 스타의 이름으로 불우이웃을 돕거나 봉사하는 일을 했다. 한 아이돌의 팬이 된다는 것은 그 아이돌을 좋아하는 문화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팬이 아닌 입장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문화에 빠진다면 규범이자 생활이 된다. 십대 소비자를 단순 소비자가 아닌 시크릿 박스의 주체로 만드는 방안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 홍보 담당 다솜이 아이들의 의견을 노트북에 받아 적었다. 회의를 할 때마다 모든 회의록을 녹취하는 동시에 기록한다. 아이디어를 무심코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다. 회의록은 아이들이 공유하기 위해 만든 비공개 인터넷 카페에 올려두었다. 나중에 회의록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거나 거기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 pp.81-82
다솜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며 반드시 선물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다솜이 조사를 위해 살펴보니 고객에게 설문을 요청하며 그냥 넘어가는 회사는 없었다. 아이들은 시크릿 박스 오픈 준비를 하면서 인터넷 쇼핑몰 창업과 관련된 자료를 계속 찾아가며 공부하고 있다. 예전에는 무심코 넘어갔던 인터넷 사이트 이벤트라든가 배너 광고를 유심히 본다. 무엇을 보든지 ‘왜?’ 라는 질문을 했다. 저 광고는 왜 저렇게 만들었지? 이 상품은 왜 이런 구성이지? 등등 자연스레 ‘왜’가 따라붙었다. --- p.82
일각에서 시크릿 박스가 지나치게 십대 뷰티에만 관심을 둔다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시크릿 박스가 비판을 받을 때 항변하는 건 십대 구매자들이라는 사실이다. 회사가 가만히 있어도 십대 구매자들이 나서서 시크릿 박스를 옹호했다. 십대가 무슨 화장이냐며 화장품을 시크릿 박스에 넣는 것을 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구매자들은 십대도 예뻐지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맞섰다. 많은 십대 구매자들이 시크릿 박스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디어 역시 십대들 누구나가 낼 수 있었고 회사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아이디어를 채택했다. 우수한 아이디어를 낸 회원은 이달의 시크릿 멤버로 선정되어 시크릿 박스 인터넷 홈페이지와 앱에 게재되었다.
비즈니스 고등학교의 마케팅 디자인과를 다니는 씩씩하고 쾌활한 여울. 여울의 집에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의 사업 실패로 화장품 재고들이 쌓인다. 자신의 방까지 가득 차지한 화장품 재고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여울은 창업 동아리에서 추천받은 창업 공모전을 알게 되고, 시크릿 박스를 통해 화장품 재고를 팔기로 하는데…
SNS홍보를 통해 재고를 정리하고 창업 공모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게 된 여울과 친구들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크릿 박스를 메인 상품으로 본격적인 창업을 한다. 직접 판매처에 가서 도매가로 물건을 사고, 상자 디자인도 하고, 회계 일을 담당해줄 사람도 구한다. 그러나 막상 시크릿 박스를 팔아보니 매출이 굉장히 저조하다. 아이들은 좌절을 겪지만 우연한 기회에 아이돌 제오와의 인연으로 시크릿 박스를 SNS에 올리게 되고, 엄청난 유명세를 얻으면서 큰돈을 번다.
그러나 시크릿 박스를 구매하는 사람이 계속 늘어도 아이들의 행복은 반비례한다. 대기업 화장품 회사의 청탁과 텔레비전 출연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유명세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우정에도 변화가 찾아오고, 아직 어린 그들에게 세상은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라는 시련이 찾아온다. 결국 아이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