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궤짝 또 한 궤짝, 모두 포장을 해서 차에 싣고 그렇게 떠나가 버렸다. 운임비가 없어 성으로 가져갈 수 없다고 나으리가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래, 그렇다면 런던으로, 파리로, 부다페스트로, 도쿄로 실어 나르자. 왕도사는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이방인들을 전송했다. 그는 스타인을 '사대인휘대약', 펠리오는 '패대인휘희화'라고 불렸다. 그의 주머니는 은전으로 두둑해졌다. 평생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다. 아쉬운 듯 이별을 하는 그는 그저 서양 어른들의 '보시'에 감사할 뿐이었다.
--- p.43
밤비의 매력은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밤비가 갑자기 솟구치는 야심을 삭혀준 적이 있으며, 들석 거리는 마음을 달래준 적이 있고, 또한 일촉즉발의 싸움을 저지해준 적이나 흉악한 음모를 사라지게 해준적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물론 밤비로 인해 웅장한 큰 뜻이나 용감한 전진 또는 강한 열정이 사그라든 적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조사한적이 있는지는 알수 없지만,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밤비가 내리는 날, 혹시 중국역사의 흐름이 바귀었을지도 모른다. 장군은 찌푸린 눈썹을 펴고, 모사꾼들은 후회를 하며, 군왕은 화를 삭히고, 영웅호걸도 냉정을 되찾으며, 협객은 발걸음을 멈추고, 전장의 북소리가 멈추며, 준마가 말구유로 돌아오고 , 날카로운 칼이 다시 칼집으로 들어가며, 상소도 끊기고, 칙령이 회수되며, 배의 닻이 내려지고, 술기운도 사라지며, 광란이 해소되고., 호흡이 편안해져 마음이 평온해진다. 밤비는 이렇게 모든것을 바꾼다.
--- p.407
막고굴은 미칠 듯한 기쁨이자 해방이다. 그 품 안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가 되어 시공을 날아오른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화와 우언의 세계로, 신비한 우주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미칠 듯한 기쁨이 곧 천연의 질서가 되고, 해방이 천부의 인격이 된다. 예술의 천국은 바로 이러한 자유의 전당인 것이다.
막고굴은 일종의 의식, 종교를 초월한 종교이다. 불교의 교외는 이미 아름다움의 불꽃 속에 사라져 의식에 있어야 할 신비함과 정결함 그리고 아득한 높음만이 남아 있다. 이를 아는 이들만 일생을 바쳐 그 의식에 몰입하고, 그 세례와 훈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의식은 웅장하고 또한 광대하다. 심지어 그 의식 속에는 사막이나 둔황 그리고 막고굴도 없다. 의식은 사막의 기점에서 시작해 사막 속에 줄줄이 이어진 깊은 발자국들이나 밤 바람 거센 장막, 하얀 유골, 그리고 긴 털 휘날리는 낙타 등 위에서 이루어진다. 눈물이 흐르고 또 흘러 두 눈이 모래 바람에 모가 날 정도가 되어도, 그곳에서 돌아오는 순례자들의 두 눈은 수정처럼 맑게 빛난다. 나는 믿는다. 종교적인 이유로 이곳을 찾은 이들은 분명 종교를 초월한 어떤 느낌을 지니고 돌아가 일생 동안 그 느낌을 그대로 지니게 될 것이며, 그 느낌은 다시 후세로 유전되어 또다시 외로운 나그네들이 이곳을 찾게 될 것이라고.
--- pp.31-32
....멀리 여행을 떠나 많은 것을 보게 되면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 이는 마치 높은 곳에서 개미들을 애려다보노라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대강 짐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의 온갖 위치는 어느정도 선택의 여지가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이런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여부와 용인의 폭이 한 개인의 마음의 나이를 결정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좀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이 하나의 문화나 역사의 잠재능력과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결정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어차피 떠돌아다니는 표박의 여정이라면, 매번의 머무름 역시 모두 새로운 출발임을 부정 할 수 없다. 미러한 생각으로 인해 내 붓 끝에서도 문화를 찾아 떠나는 힘든 여정의 글이 나오게 된다.
사람은 늙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젊어질 수 있다. 어찌 감히 엄청난 우리들의 문화에 대해 무언가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저 고통뒤의 여운, 초조함뒤의 회심, 깊은 사색 뒤의 여유,늙음뒤의 젊음이 드러나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사치스러운 희망일 뿐이다....
--- p.12-13..서문
....멀리 여행을 떠나 많은 것을 보게 되면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 이는 마치 높은 곳에서 개미들을 애려다보노라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대강 짐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의 온갖 위치는 어느정도 선택의 여지가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이런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여부와 용인의 폭이 한 개인의 마음의 나이를 결정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좀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이 하나의 문화나 역사의 잠재능력과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결정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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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떠돌아다니는 표박의 여정이라면, 매번의 머무름 역시 모두 새로운 출발임을 부정 할 수 없다. 미러한 생각으로 인해 내 붓 끝에서도 문화를 찾아 떠나는 힘든 여정의 글이 나오게 된다.
사람은 늙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젊어질 수 있다. 어찌 감히 엄청난 우리들의 문화에 대해 무언가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저 고통뒤의 여운, 초조함뒤의 회심, 깊은 사색 뒤의 여유,늙음뒤의 젊음이 드러나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사치스러운 희망일 뿐이다....
--- p.12-13..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