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나는 그 조건이라게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뭔데?'
나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돼.'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로 내게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밤 정말 즐거웠어.댄스파티에 데려가줘서 고마워.'
그녀는 그처럼 토사물 투성이가 되어서도 그날 저녁이 즐거웠다고,그리고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제이미 설리번은 그런 아이였다.정말로 사람을 돌게 만드는 데가 있는 애였다.
--- p.55----P.74
자기 이름을 다 쓴 그녀는 그 아래에 그 해에 이루고 싶은 목표들을 썼다.'자신감'이 첫째였고, 다음이 '자기 인식'.세번째가 '자기 성취'였다.그녀는 자기 어쩌구 하는것을 몹시 좋아했다.당시에 그녀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테지만 정신심리 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정말로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야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보포트 고등학교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남녀 학생 비율이 반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이 교실엔 여학생이 90퍼센트가 넘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남학생이라고는 나말고 한명 더 있을 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사람들아 보라, 나 여기 왔노라'하는 듯한 느낌에 잠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온통 여자애들 뿐이잖아...그래도 시험이 없는 과목이잖아, 이 두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쨋든 나는 그 동네에서 가장 진보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애는 아니었으니까.
--- p.28-29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날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더 나이를 먹고, 더 현명해졌을지도 모른다. 그 때 이후로 또 다른 사람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침내 내가 지상의 그림자를 거두고 떠날 때가 오면, 그날의 기억들이 내 마음속을 떠돌 마지막 영상이 될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반지를 뺀 적이 없고 그러고 싶다는 생각도 가져본 적이 없다.
깊이 숨을 쉬어 상쾌한 봄 공기를 들이마신다. 보포트도 변했고 나도 변했으나 공기는 여전하다. 그것은 여전히 내 어린 시절의 공기이고, 내 열일곱살 때의 공기이다. 숨을 내쉬자. 나는 다시 쉰일곱 살이 되어 있다. 그러나 괜찮다. 나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하늘을 바라본다. 아직 채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어서이다. 나는 이제 믿는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 pp.257-258
그녀가 그 말을 했던 날, 그녀의 집에서 헤그버트와 함께 앉아 있을 때, 제이미는 내 질문들에 참을성 있게 대답했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의사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희귀한 병이어서, 의사들이 알고 있는 어떤 치료법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여름, 새학년이 시작되었을 때는 증세를 느끼진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몇 주일 전부터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진행된대. 아무렇지도 않다가 몸이 싸움을 계속할 수 없게 되면 아프기 시작한다는 거야."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면서, 나는 연극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연습을 … 그렇게 오랫동안이나 … 하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
"그랬을지도 모르지."
내 손을 잡고 말을 끊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연극을 한 덕에 그렇게 오랫동안 건강할 수 있었던 거야."
그녀는 칠 개월 전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 때 의사들은 그녀에게 일 년, 어쩌면 그보다 못 살지도 모른다고 예측했다. 요즘 같으면 다른 얘기가 됐으리라. 지금이라면, 의사들은 그녀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은 40년 전 일이었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기적만이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 pp.2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