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의 주제가 바로 이문장에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즉 이상의 비밀의 한가운데 있는 꽃을 그의 안해로, 그 꽃을 내려다보면서 날아오르는 새를 자신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안해낙타를닮아서편지를삼킨채로죽어간보다' 라는 [아침]의 시 구절이 안해의 비밀과 관련한 구절이라는 것은 앞서 피터 주 선생님께서 잘 설명해주신 바 있습니다. 바로 이상 자신이 모르는 비밀을 가진 안해를 뜻하죠. 이렇게 놓고 볼때, 안해를 '비밀의 한가운데 있는 꽃' 으로 본 것은 상당히 타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후략)
--- p.188,"오감도시제16호 실화" 발표 가운데
운명은 마지막 순간에 모든 논리체계를 무너뜨리고 이제까지 지나온 그 모든 광경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말했거니와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논리적으로 내 삶은 사소하게 바뀌어버렸다. 내가 처한 이 어두움의 상태는 그 사소함의 논리적 귀결점이다.
--- p.132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겨우 참았다. 옷을 갈아 입고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왔다. 그리곤 방안에 누워 가끔 맥주를 홀짝거리며 서혁민의 수기를 읽었다. 맥주탓에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일어선 것을 제외하곤 쉬지 않고 계속 잃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도대체 이 사람의 삶이란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작가의 존재감에 압도돼 평생 그 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며 살아왔다. 그 작가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 쓰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삶까지 따라한다. 단어 하나하나는 모조품에 불과해 아무런 생명이 없었으며 삶은 누군가 한번 살았던 삶이다. 푸른 나무 그림에 회색을 덧칠한 꼴이었다. 이상을 통해 한번 생명을 얻었던 언어와 삶이 그에게 와서 죽은 갑각류의 껍질처럼 한낱 껍데기에 불과했다.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낸 듯 자신감이 없었고 글에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겁이 났다. 이를 위해 일생을 바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은 1936년 12월 14일, 김기림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기어코 동경 왔오. 와보니 실망이오. 실로 동경이라는 데는 치사스런 데로구려!' 서혁민은 그의 수기라는 소위 『이상을 찾아서』에 이렇게 썼다. '기어코 동경에 왔다. 와보니 실망스럽다. 실로 동경이라는 데는 치사스런 곳이다.' 같은 해 12월 23일, 이상은 도쿄 진보초고서점가를 둘러보다 『타임즈판 상용영어 4천자』라는 책을 샀다. 서혁민 역시 진보초에서 『현대인을 위한 상용영단어 30000』이라는 책을 샀다. 그는 글을 베껴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이상의 삶까지 흉내냈다. 그건 자기 삶을 판돈으로 거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문학작품의 아류는 쉽지만, 삶의 아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수기는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pp.74~75
김해경은 죽으면서 잃어버린 꽃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비밀,김해경이 죽어 이상이 되는 그 비밀을 되찾을 수 있었다.그는 이제 가난하지도 허전하지도 않게 됐다.그러나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도꼬에 와서 죽는가?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내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서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며 나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오감도 시 제 16호 실화'라고 쓰기 시작했다.이는 바로 내가 죽어 영원히 이상으로 다시 사는 길이기도 하다. 내 오랜 꿈. 이로써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자--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꾿빠-이.
--- p.166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그러나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禍)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고하는 것이니... 테잎이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傷)채기도 머지않아 완치될 줄 믿소. 상채기도 머지않아 완치될 줄 믿소.
---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