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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이들의 집

구렁이들의 집

최인석 | 창비 | 2001년 03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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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03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99쪽 | 444g | 148*210*20mm
ISBN13 9788936436605
ISBN10 893643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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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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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인석
1953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했고, 1980년 희곡「벽과 창」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1986년 소설문학 장편소설 공모에『구경꾼』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소설 창작을 시작하였다.「그 찬란하던 여름을 위하여」등의 희곡으로 대한민국 문학상, 백상예술상, 영희연극상을 수상했고 소설집『내 영혼의 우물』로 제3회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는『나를 사랑한 폐인』『혼돈을 향하여 한걸음』『인형 만들기』『아름다운 나의 귀신』『안에서 바깥에서』『내 마음에는 악어가 산다』『새떼』『잠과 늪』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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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그의 젊은 아내가 아니라 대통령 자신이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일간신문의 만평마다 배가 불룩한 대통령이 등장했고, 텔레비전의 뉴스 시간에는 어떻게든 대통령의 모습을, 특히 배를 부각시켜, 한번이라도 더 잡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 카메라 기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화면이 시청률 경쟁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되었으며, 국회에서는 야당이 대통령의 성(性)이 바뀌었다면 과연 그가 대통령 선거 당시 국민이 선출한 사람과 동일인인지 아닌지를 법적으로, 의학적으로, 또는 성적(性的)으로 추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람들은 전철에서, 직장에서, 술집에서, 집에서 대통령이 과연 아들을 낳을 것인지 딸을 낳을 것인지를 놓고 흥미진진한 추측과 농담과, 더러는 염증이나 걱정을 주고 받았다.

하루종일 비가 쏟아졌다. 까페 샤면의 홀 안에는 습기가 가득했고, 중앙에 놓인 그랜드피아노의 현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녹이 슬어갔으며, 연주된 적이 거의 없는 그 피아노가 머금은 육중한 침묵에도 녹이 슬어갔다. 홀 안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의 젊은 남녀. 창가에 앉아 얘기도 나누지 않은 채로 하염없이 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내다보고 있는 한쌍의, 나이가 어울리지 않는 늙은 여자와 젊은 남자. 맥주병을 하나 앞에 놓고서도 맥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독서삼매에 빠진 중년의 남자 한사람. 저녁 여섯시에 낮당번 경석을 퇴근시키고 내가 교대한 이래 드나든 손님은 다섯. 맥주 여섯 병, 마른안주 하나. 그리고 커피와 오렌지주스 한잔씩. 커다란 통창 너머 거리에서는 온갖 술집들의 조명과 광고간판들이 발악하듯 자극적으로 울긋불긋 번쩍거리고 있었고, 성장(盛裝)한 여자들이, 술꾼들이, 그들 사이로 곡예처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커다란 차들이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pp. 166-167
그가 막 언덕을 오르기 위해 발을 떼어놓을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돌아서며 뒷걸음질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고스란히 얼어붙었다. 송아지였다. 푸른 송아지가 온몸이, 뿔과 눈마저 푸른색이었다. 이어, 그의 입에서 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송아지의 푸른 눈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이 그에게 뭔가를 애원하고 있었다. 상구는 손을 들어 송아지의 목을 쓰다듬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살 때 그는 소를 먹인 적이 있었다. 소는 얼마나 순한 짐승이던가. 그러나 푸른 소라니? 그는 멀거니 푸른 송아지를, 그 송아지의 푸른 눈자위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송아지가...한주성늘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송아지의 목덜미에 손을 대 채 오래오래 그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고, 송아지는 애원하는 듯 슬프고 푸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송아지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던 어느 순간 그는 송아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꺼번에 깨달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주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p.283-284
- 아니, 그게 아니라......넌......니 애비랑 결혼하여 신혼여행이라고 간 적이 없다. 결혼식장에서 나와서 그냥 집에 가기 멋쩍어서 남대문 극장에 가서 영화 하나 보고 순대 안주로 소주 좀 먹고 집으로 돌아왔지. 니 애비는 곤드레만드레 취해 내 곁에까지는 오지도 못하고 이부자리 바깥에서 고꾸라져 잠들어버리더라. 자는데......새벽녘에 가슴이 선뜻해서 눈을 떠보니 커다란 구렁이 한마리가.....어마어마하게 굵은 구렁이 한마리가 내 배 위에서 슬금슬금 기어내려 오더구나. 시뻘건 혓바닥을 널름거리면서 내 눈속을 들여다보는데.....아이구, 생각만 해도 소름끼친다.

니 애비는 여전히 요때기 바깥에 엎어져 있고. 그렇게 해서 나온 새끼가 너다. 다른 애기들은 다 울면서 태어난다는데. 넌 어쨌는지 아냐? 웃으면서 태어났다. 깔깔깔. 기가 막혀라.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는지 아냐? 그뿐이 아니다. 임신이 됐는데, 열달이 지나, 일년이 지나, 이년이 지나도 니가 나올 생각을 안하더라. 십 년 만에, 남산만한 배를 안고 다니면서도 임신중이라는 것마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는데, 어느날 자다가 배가 아파 변소 가려고 일어나는데, 니가 혼자서 내 뱃속에서 기어나왔다.

니가 내 뱃속에서 십년을 산 놈이다. 징글징글도 하지. 그러니까 니 나이에다가 열살을 더해야 그것이 니 진짜 나이다. 소름끼치고 무서워라,아이구. 니 애비는 나한테서 새끼 하나도 못 얻었다. 니가 십년이나 내 뱃속을 차지하고 들어앉아 있었으니 어떻게 새끼인들 생겼겠냐. 불쌍한 인간. 차라리 잘된 일이지. 잘된 일이고 말고.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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