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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구(黃狗)의 비명(悲鳴)
폭염(暴炎) 포대령(砲大領) 혜자의 눈꽃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
호 : 하동(河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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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골의 거리는 마술의 거리처럼 금새 꽉 찼다가 곧장 텅 비워져 버리기 일쑤였다. 양색시들이 목적도 없이 도로의 횡단을 반복하다가 거리 모퉁이로 사라지면 예의 하릴없는 미군 떼거리들이 갑자기 거리를 부산하게 하다가, 그녀들의 뒤를 좇아 금새 사라지곤 했다. 한동안 거리는 텅 비는 것이었다.
--- 「황구(黃狗)의 비명(悲鳴)」 중에서 “도대체 한심스러운 사람들끼리만 모였군. 하긴 그렇지. 따분하지 않고서야 이런 용광로 같은 술집 속에서 술로다 불을 지르고 있겠어? 그런데 말이요, 형씨는 왜 색안경을 쓰고 있는 거요? 답답해 보이는데.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는 눈으로 얘기를 해야지.” “더워서 그렇소.” “색안경을 벗는 게 더 시원하지 않겠오?” “몸뚱이가 더운 게 아니거든… 사실상의 폭염은 머리골 속에서 끓고 있는 거요. 머리골 속이 캄캄한 것들로 꽉 차 보시오. 무수한 죄악들을 숨긴 흔연스러운 세상을 제 색대로 봐 주다가는 필경 미치고 말 것 같소… 한풀 가리우고 대신 내가 당하고 마는 거지.” --- 「폭염(暴炎)」 중에서 그것은 지극한 슬픔 속에서 자연 분출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심오한 비극의 의식을 애써 떨쳐 버리려고 노력할 때 처하게 되는 감당 못할 허탈 속을 솟구치는 것이다. “가이새끼들! 보라우! 내가 시시하게 죽어 넘어디나 말야! 쫓기구 서라므니 밀리구 서라므니 해 개지구 시시하게 뻗나 보라우! 젊어 요절도 없구 늙어 자연사도 없어! 이 김달봉이에겐 오직 전사만이 있을 뿐이야! 하사! 내 말 알가서?” 천만년 살 것 같던 포대령이 죽었다. 아니, 피가래가 끓던 포대령의 마지막 가쁜 목소리는 끝내 전사(戰死)라고 우겨 댔다. --- 「포대령(砲大領)」 중에서 혜자는 몇 번 내 얼굴을 흘끔거리더니 이내 바지 주머니에다 두 손을 찔렀다. 그리고 나서 놀이터에 놀러가는 아이처럼 흔연스럽게 깡총대며 집을 향해 갔다. 내 눈 안으로 드는 것들은, 내 삭월셋방 쪽에서부터 개울까지 나란히 패인 내 긴 발자국들과 잣새들의 푸득거림에 흩날리는 눈가루, 그리고 그 잣새들을 날려 보내고 난 영근 솔잎들의 하들하들 떨어 대는 연한 미동들뿐이었다. --- 「혜자의 눈꽃」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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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여성 작가인 박화성의 아들로 태어난 천승세는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점례와 소〉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일찍이 그의 스승인 작가 김동리가 “무서운 재능이요 비상한 천재다. 남성적인 산문예술가로서 우리 문단의 유니크한 존재”라고 언급했고, 문학평론가 백낙청도 “그는 토속적 체취를 남달리 건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작가다. 그것은 곧 천승세 씨가 우리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가장 투철하게 의식하고 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천승세의 작품 대부분은 우리 사회의 최하층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민중의 애환을 그려 낸다. 그들의 애환은 우리의 역사적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과 밀착된 것으로, 천승세는 그들의 삶의 주름 사이에서 포착되는 삶의 비정함을 그의 탁월한 미적 감각으로 포착한다. 그 대표작 중 하나로 〈포대령〉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에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은 한국 전쟁의 상흔이다. 천승세 스스로 “나는 명색이 50년대 작가”라고 강조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50년대 작가’로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소설적 자의식이 투철하다. 말하자면 그는 ‘50년대 작가’, 즉 전후 작가로서 한국문학사에서 떠맡아야 할 시대적 책무를 회피하지 않는다. 〈포대령〉은 바로 이러한 그의 전후 작가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황구의 비명〉은 창작과비평사가 제정한 제2회 만해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천승세의 서사적 윤리 감각을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수작(秀作)이다. 두 작품 〈포대령〉과 〈황구의 비명〉에서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민중의 애환과 비극성을 고스란히 짊어진 ‘포대령’과 ‘은주’의 삶을 섬세히 들여다보며, 그들의 상처를 따뜻이 감싸 안는 작중인물 ‘나’의 심미안이다. 우리는 막무가내로 타자와 연대할 수 없다. 타자의 타자성을 제아무리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서로 다른 타자적 존재들은 그 타자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완벽히 소통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지레 실망할 필요는 없다. 타자가 품고 있는, 타자도 미처 모르는, 타자 고유의 미적 가치를 또 다른 타자가 섬세하게 발견할 수 있다면, 타자들 사이에는 심미적 공감이 순간 일어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의 연대감이 싹튼다. 이러한 연대의 감각으로부터 ‘미적 윤리’가 새롭게 발견된다. 천승세의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미적 윤리’에 주목해야 한다. 〈혜자의 눈꽃〉은 언뜻 천승세의 주류 소설 세계와 이질적인 것으로 읽히지만, 이 소설을 ‘미적 윤리’의 측면에 주목해 읽어 보면, 천승세의 소설이 지닌 독특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폭염〉도 ‘미적 윤리’의 측면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주요 인물들은 나름대로의 사연 때문에 사회와 자신에 대한 슬픔, 분노 그리고 자괴감으로 뒤엉킨 죄의식을 갖고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슬픔, 분노, 죄의식이 복잡하게 뒤엉킨 우리 사회의 어둠에서 과연 누가 이 모든 것들을 책임질 수 있는가. 이 작품은 1970년대 유신 체제의 정치적 알레고리의 맥락으로 읽을 때, 더한층 구체적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작중인물들은 폭염이 한창인 개펄 곁에서 이러한 삶의 한 단면을 주고받는데, 이것은 달리 말해 유신 체제와 같은 폭압의 시대에 관계가 단절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민중의 암담한 현실을 에둘러 드러낸 셈이다. 요컨대 천승세의 소설 세계는 역사와 생활의 대지에 뿌리내리며 살아야 할 민중의 위엄성과 타자들 사이의 심미적 소통과 공감의 윤리 감각에 기반을 둔 ‘미적 윤리’를 새롭게 발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민중의 삶의 연대가 갖는 가치를 소중히 다듬는다. 천승세 소설의 매혹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