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책의 콘셉트를 잡을 때 반사적으로 떠올렸던 카피들이 있다. “출판노동자 분투기”, “이것은 왜 출판이 아니란 말인가?” 짐작하겠지만 《편집자 분투기》,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패러디다. 전 직장에서 호되게 경험한 노동조합 활동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늘 이런 것에 의아함을 느껴왔다. 대외적으로 ‘출판’에 대해 말할 권리는 성공한 대표들에게만 있는 걸까? 아니면 자칭·타칭 출판평론가 몇몇에게? 뭐,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들이 한국 출판계에서 일궈 온 업적과 위치를 인정하는 일, 그걸 이어받아서 더 분발하는 일이 부당하게만 느껴질 리는 없다. 하지만 이걸로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그래, 그거야말로 진정한 ‘출판’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내가 매일 하고 있는 ‘이것’, 기존에 나와 있는 출판 관련 책들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 이 애매하고 고단하고 비루한 하루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수습(修習) 출판? 출판 전초전? 알다시피 우리의 코앞에 놓여 있는 출판사의 일상은 내로라하는 출판 기획자들의 회고담처럼 멋지고 짜릿한 것이 아니다. 출판으로 한 번도 ‘성공’해 보지 못한 이들의 출판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 p.9~10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데 난 이전까지 한 번도 내가 ‘노동자’가 되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고, 내가 속해서 일하고 있는 회사를 타자화해서 지칭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사 측’ 사람들이나 회사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 분들의 억눌렸던 분노와 노동조합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에 대해 조금씩 이해를 하는 한편, 자의적이거나 감정적인 말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상당히 순진했고 무지했다. 아버지가 밤늦게 지친 모습으로 퇴근하시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봐 왔는데도 나는 노동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은 조합 내에서는 공감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혼란에 대해서는 회사가 빨리 깨닫게 해 주었다.
--- p.27~28
그래서 다시 노동권을 이야기하고 싶다. 교육 프로그램도 재충전도 쫓기지 않는 일정도 모두 이 노동권에서 출발해서 풀어 나가야 하는 문제인 것 같아서다. 책 만드는 일을 더욱 완성도 있는 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요구돼야 하는 건, 일하는 사람에게만 강요되고 포장되는 열정과 희생이 아니라, 제대로 된 노동 조건을 제시하고 그 권리를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출판계가 어렵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동력과 인건비를 짜내는 방식만이 우선되고 있는 건 아닌지 안타깝기도 하다.
--- p.75~76
이제 거꾸로 10여 년을 되돌아본다. 최근 몇 년 사이, 노사 문제로 사회면을 장식한 출판사가 많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출판사들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책을 낸다고 평을 받는 곳들이었다. (중략) 출판이라는 문화예술 산업에 대한 허영과 실질적인 경영 사이의 괴리. 결국, 그 출판사들 대부분의 노사 문제는 그 괴리를 인정하지 않거나 위장해서 터진 문제였을 테다. 대부분 처음 사건보다는 그 대응 방식이 더 큰 문제였다. 말도 안 되는 현학적 변명을 나열한 뒤 결국은 사원과 노동조합원의 근무 태도를 지적하는, 뻔하고 역겨운 인문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성명서와 대응 방식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적 성장을 하면서도 인문의 옷을 입은 채 그 품위를 유지하고픈 그 속물적 허영 말이다. 그런데 책에 대한 그러한 마음은 스스로에게 잘 인지되지도 인정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허영은 책 만드는 사람 모두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 p.117~118
책을 생각했다. 책은, 도대체, 뭘까? 책은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허상인가? 책은 ‘386워너비’들의 사회적 패션을 완성하는 장신구 같은 건가? 그렇다면 책은 혹시,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출판 강좌 같은 곳에서 대선배들이 늘어놓던 무용담을 들을 땐 전혀 하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출판은 분명 화려하고 드라마틱하고 치열하고 아름답고 때론 온화하고 지적이며 정의롭고 섬세하고 다정했다. 출판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책들이 말하는 책이란, 지성으로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신성한 생물이었고 세상의 모든 편집자들을 숨 쉬게 만드는 생의 이유이자 에너지였다. 책 만드는 자의 자세와 태도를 논하는 대선배들에게 편집자란, 명예롭고 헌신적이며 유의미하고 위대한 직업이었다. 아니 무슨 생명을 다루는 의사도 아닌데 뭐 이렇게 사명이 많은 직업이 다 있나. 그래도 의미가 가득하다고 하니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그래, 무언가를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다면 지식을 파는 편이 좋겠다.
--- p.127~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