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책상에는 아직 스탠드가 밝혀져 있었다. 사우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3을 넘어 4를 향해 달리고 있다. 사우는 몸을 일으켜 현준의 등 뒤로 갔다. 현준은 대충 훑어보기만 하는지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거 봐, 꼴통이 공부는 무슨 공부?’ 사우는 현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야, 이 미친놈아. 그렇게 읽는 시늉이나 하려면 차라리 퍼자라. 괜히 형님 수면 방해하지 말고.” 현준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대꾸했다. “잠이 덜 깼나? 공부하고 있는 사람 왜 건들고 난리야?” “야, 그렇게 후다후닥 책 넘기는 게 공부냐?” “공부하는 거 맞다니까!” “어휴, 알았다, 알았어. 그런 식으로 공부 많이 하세요, 네.” 사우는 어이없다는 듯 현준을 쳐다보다가 다시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현준에게 대학원에 진학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내심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 현준이 아니라 사우였다. 그는 또 현준에게 뒤처지고 만 것이다. 왜 그가 아니라 현준이란 말인가? 겉으로는 그 나이에 억지로 대학원에 진학해야 하는 현준을 동정하는 척했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도저히 꺼질 것 같지 않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진실과 사실」 중에서
사우는 참을 수 없는 갈증 때문에 눈을 떴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정수기 물을 한 컵 쉬지 않고 들이켰다. 어슴푸레한 창밖으로 소담스러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밤새 켜둔 주황색 간접 조명은 평화로운 실내의 모습을 은은히 비추었다. 침대 위의 승희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현준의 팔을 베고, 현준의 가슴에 팔을 두른 채 쌕쌕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사우의 가슴이 자꾸 먹먹해졌다. 글루미 선데이. 사우에게는 너무 우울한 일요일 새벽이었다. --- 「본 어게인」 중에서
벽난로가 있는 아담한 일본식 주점에서 승희는 따뜻한 사케를 한 잔씩 마셨다. 한쪽 벽면에는 이곳을 방문했던 손님들의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대부분은 젊은 연인들이었다. 그러다가 머리가 하얀 노부부가 V자 손가락을 내밀고 웃는 사진을 발견했다. 승희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여기 있는 이 많은 사람들 증에서 과연 누가 이들처럼 함께 늙어갈 수 있을까?’ 그러면서 승희는 현준을 떠올렸다. ‘그럴 수 있을까? 우리도…….’ 날짜와 이름이 다양한 필체로 적혀 있는 사진을 둘러보면서 승희는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현준을 생각했다. 건너 테이블에는 어린 연인이 앉아 있었다. 예쁘게 포장된 사탕봉지를 가슴에 안은 여자가 발랄하게 웃자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남자도 환하게 웃었다. 종업원이 이들에게 포즈를 주문하면서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들이댔다. --- 「슬픈 괴물의 전설」 중에서
사우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현준은 재빠르게 통신장비가 든 가방을 챙긴 다음에야 비로소 사우를 바라보았다. 사우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 “사우야!” “미안하다…….명령이야.” 사우가 어두운 눈으로 현준을 쳐다보았다. 현준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왜 네가 나를…….” 잠시 머뭇거리던 사우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네가 나였어도 아마 똑같이 했을걸. 이건 나에게 떨어진 임무야. 정말 미안하다.” 총을 든 사우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 순간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문이 부서졌다. 사우는 본능적으로 방 구석으로 몸을 굴렸다. 부서진 문 쪽에서 총알이 비 오듯 날아들었다. 사우는 몸을 굽히고 응사하면서 방 안을 살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의 숫자가 쉬지 않고 깜박이고 있었다. 현준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발코니 문이 어느 새 활짝 열려 있었다. 사우도 발코니 쪽으로 몸을 날렸다. 현준은 물론 사우에게는 오늘이야말로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하루였다. 아직 어떻게 끝날 것인지 모르는 하루. 특히 사우는 백산 부국장이 그를 호출하던 순간부터 도저히 깨어나지 않는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이 무시무시한 호랑이 굴에서 무사히 벗어나야만 했다. --- 「우울한 부다페스트」 중에서
사우의 뇌리에 현준과 함께 했던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가 언제나 따라 잡지 못했던 현준. 그는 늘 현준의 등 뒤에서 숨을 헉헉대며 따라가야 했다.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여자조차 현준에게 빼앗겼다. 아니, 사실 그에게 승희를 빼앗긴 것은 아니다. 사우에게는 아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표현할 아주 작은 기회조차! 그는 늘 현준의 페이스에 말려들었고 언제나 패자가 되었다. 백산이 다시 빈 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웠다. “물론 이번 일에 김현준을 선택한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지. 자네는 김현준의 과거를 알고 있나?” “예. 저와는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 “아니, 그전의 과거 말일세.” 백산은 또 하나의 파일을 사우에게 던졌다. “그걸 읽어보게. 그러면 왜 NSS가 김현준을 버리기로 했는지 확실히 이해하게 될 걸세.” 사우가 서류 파일을 집어드는 순간 백산이 그의 가슴에 영원히 빠질 수 없는 대못을 박았다. “자네도 언제까지나 샬리에리로 살 수는 없네. 샬리에리가 모짜르트보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오래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순간 사우는 단칼에 무릎이 잘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