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계화 순간부터 제국 소멸의 마지막까지 피어나고 또 사그라지던 시간의 무늬가 전개됩니다. 그 무늬는 카타콤베(지하무덤)에 나타난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미지에서부터 비잔티움 교회의 음악과 문학, 건축, 그리고 비잔티움 미학과 신학의 핵심적 증표랄 수 있는 이콘(성상화, q?Z)까지를 포괄합니다.
우선 비잔티움 문화 예술을 살펴보기에 앞서 비잔티움 세계의 근간을 형성할 초기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원리를 내재적(현실적, 실제적) 성격의 개념과 초월적(상징적, 추상적) 성격의 개념으로 구분하여 규명합니다. 앞으로 진행될 비잔티움 문화의 근본적인 성격과 방향을 결정짓는 단서가 여기서부터 선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8~9세기 비잔틴 이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형상과 우상 숭배 논쟁의 사상적 근거는 여기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문화가 비잔티움 제국 형성기에 미친 영향과 초기 그리스도교 이미지가 나타나는 카타콤베의 상징적 이미지를 다룹니다. 그를 통해 초월적 본질인 절대와 유한적 인간 사이에 시각적 중개자가 마련되고, 이를 이어받은 비잔티움의 문화가 시각적 이미지의 문화라는 사실이 유추됩니다.
이후에는 초월적 신비주의를 지향하는 비잔티움의 역사와 문화의 기본적 성격을 교부 문학과 전례 음악을 포함한 비잔티움 예술 세계와 교회 건축에 맞추어 기술합니다. 비잔티움 세계에서 교회 건축은 오늘날과 같은 기능적 관점 이전에, 신의 대리인이자 지상의 그리스도로 간주되는 제국의 황제들이 지상에 세우는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으로서 하나의 소우주이자 제국의 수도를 성스럽게 만드는 신에 대한 봉헌물이었습니다.
이어 비잔티움 문화의 ‘신학적 미학(Theological Aesthetics)'을 고찰합니다. 비잔티움 세계는 유한한 시간 너머의 ’초월적 아름다움‘을 상정합니다. 그리하여 그를 인식하는 방법도 불교의 ’공(n) 사상‘과 도교의 ’노장 사상‘의 언어에 가까운 부정과 역설의 언어를 빌려 이루어집니다[이를 아포파시스(apophasis)적 인식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은 인간을 초월하는 궁극적 본질로서의 신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도구가 결코 아니라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겸손하며,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실천적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겸손‘과 ’굴종‘의 의미인 '케노시스(kenosis)'와 '금욕’과 ‘고행’의 의미인 '아스케시스(askesis)'가 실천되는 수도원 문화가 생성됩니다.
또한 헌신, 고결한 행위, 자기훈련과 성찰, 내면의 고요의 실천적 장소인 수도원 문화와 함께 침묵과 관조의 상태에서 신을 일별하고자 하는 신비스러운 영적 체험을 의미하는 ‘헤시카즘(Hesychasm, 정적주의)'은 비잔티움 세계의 빛과 침묵의 신학의 배경을 조성합니다.
나아가 비잔티움 세계에서는 궁극적인 초월적 존재를 ‘아름다움’이라 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란 감각을 통해 마음에 드러나는 계시의 한 형태라 보기에, 이성적 추론보다는 직관이나 감각적 이미지, 다시 말해 예술적 사고나 감각적 지식이 이에 부합되는 방법으로 간주됩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바로 이러한 초월 지향성의 대표적인 감각적 도구인 비잔티움 정교의 이콘―모자이크를 포함하여― 대한 해석과 설명에 바쳐집니다. 그리하여 단순하게 ‘성상화’라는 단편적인 지식, 또는 범접할 수 없는 신에 대한 우상으까지 왜곡되어 전해지는, 비잔티움 및 러시아 이콘의 의미와 미학적 의의를 구체적인 자료들과 함께 풀어나갑니다.
서구 라틴적 가치관에서 볼 때, 이콘은 이집트 예술과 같은 원시주의 예술의 하나이자 그리스 고대 예술이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보다 생명력이나 생동감을 결여한 열등한 예술로 간주되어 버리기도 하였으며, 신에 대한 우상이라는 기나 긴 역사적인 신학 논쟁 기간을 거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세계와 그의 적자인 러시아 정신문화까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의 하나인 이콘은 단지 성서에 언급된 성스러운 사건에 대한 단순한 회화적 재현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와 통교할 수 있는 매개적 요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콘에 나타난 화법의 독특함은 단순한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사적 맥락 전체에서 또 다른 사유 체계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콘 화법의 독특성을 몇 가지로 일별하자면, 인물 형상화의 측면에서 후광과 정면성의 원칙을 유지하고, 공간 구성의 형식에 비례와 기학학적 구조를 적용하였으며, 르네상스적 기법인 일점 원근법과 대비되는 역원근법을 따릅니다. 또한 이콘만의 독특한 색채 상징을 통해 시각적 인상을 종합함으로써, 이콘을 비례, 기하학적 구조, 역원근법을 섬세하게 내장하는 상징적인 의미체로 고양시킵니다. 이때 이콘은 이콘만의 독특한 회화적 조형언어의 미시적 요소들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총체적인 거시 텍스트가 됩니다. 그리고 비잔티움의 문화사 속에서 단순한 시각적 매개물을 넘어선 ‘영원으로 열린 창문’이란 실천적 기능을 부여받게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원형과 헬레니즘 문화의 경쾌함, 헤브라이즘의 엄숙함을 종합하여 상징적이며 성스러운 의미의 체계, 혹은 인식의 체계를 구축한 비잔티움의 세계는 결코 서구 라틴의 중세와 비견하여 열등한 문화로 오인 받아서는 안 됩니다. 러시아의 붉은 광장, 성 바실리 사원을 들고 나서던 그 고요한 행렬은 아마 이러한 비잔티움 세계로부터 오늘까지 흘러온 성스러움의 행렬이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줌 들지 않는 햇빛으로 내부는 어두웠으나 벽면을 가득 채운 이콘들은 물리적인 파동을 넘어서는 초월의 빛을 내뿜고, 사람들은 그를 충만한 표정으로 영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