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69년 12월 왕위에 오른 아슈르바니팔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서관을 니네베에 세웠다. 그는 제국의 각 지역, 즉 아수르, 니푸르, 아카드, 바빌론 등에 필사가들을 파견하여 그곳에 남아 있던 모든 고대 문헌들을 수집, 편집, 필사하게 했다. 왕이 직접 필사한 책들도 적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모은 책들을 왕궁에 보관했고, 결국 이렇게 외칠 수 있었다.
"나 아슈르바니팔은 나부(Nabu,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중요 신. 마르두크의 아들)의 지식을 얻었고 판에 글 쓰는 법을 배웠노라…… 나는 명증하지 않았던 나눗셈과 곱셈의 오랜 수수께끼를 풀었고…… 수메르의 고귀한 글들과 아카디아 인들의 모호한 말들을 읽었으며, 대홍수 이전 돌에 새겨진 글들을 해석했노라."
설형문자 고문서학에 대해 그는 말들의 "신비하고, 은밀하며, 뒤죽박죽인" 속성을 잘 말해주었다.
1200 개의 서로 다른 텍스트들은 그곳이 25세기 전에 세워진 왕의 도서관임을 밝혀주었다. 여기에는 주술, 의례, 신과 관련된 문헌, 수메르어 어휘 사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빌로니아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비롯한 신화적인 이야기, 천지창조 이야기, 최초의 인간 아다파 신화(도서관의 발굴이 없었다면 전혀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학술적인 지침서와 논문, <천일야화>의 선구적 형태라 할 수 있는 '니푸르의 가난한 사람' 같은 민담 등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631년 이후 이 최초의 장서애호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죽음이나 문화유산의 소멸에 대한 자료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아슈르바니팔이 죽고 나서 그의 지적 유산들이 공백기를 맞았으리라는 가설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한다.
물론 우리는 니네베6가 기원전 612년경 바빌론, 스키타이, 메디아 동맹의 공략에 무너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이때가 아슈르바니팔이 사망하고 나서 15년쯤 지난 때였을 것이다. 점토판들은 왕궁이 불탈 때 위쪽 서가에서 선반과 함께 떨어졌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발굴된 판들이 왕의 도서관이라는 빙산에 비하면 그야말로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 도서관에서는 각각의 방마다 특정 주제 하에 책들을 분류해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양'의 방에서 매사는 빠르게 진척되었다. 1849년에서 1854년 사이에 3만 개의 판이 출토되었다. 그 부피는 100㎤, 오늘날의 책으로 환산해보자면 500페이지짜리 4절판 인쇄본 500권에 해당한다.
--- p.33 <2장 : 흙이 말하던 시절>
왕이 천명한 목표는 그리스의 모든 문학과 과학을 복원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서를 완전히 갖추어 최고의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서'를 사들였을 것이라는 가설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렇더라도 문제의 장서가 꼭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을 가리킨다는 법은 없다. 어쨌든 이 같은 반강제적 징발 외에도 이집트, 특히 테베나 멤피스에서는 도서의 견본 징수가 이루어졌다. 무세이온의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면서 짊어지고 왔을 책 보따리의 양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책을 모으기 위한 노력은 번역과 비평선집 편찬, 필사본 제작에 소요된 막대한 노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비트루비우스18가 "책을 무한대로 만들기 위한 씨 뿌리기"라고 말했듯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무엇보다도 고대 최대의 출판사 역할을 했다. 게다가 알렉산드리아는 오늘날의 홍콩 같은 국제도시였기 때문에 수많은 필사본들이 항구로 들어와 내륙으로 퍼져나가는 거점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은 '처음에는 고정되지 않은 형태로 구전되어오던 고대 문학을 책으로 만드는' 일을 했다. 이리하여 초기 불경, 200만 행에 달하는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텍스트, 칼데아(바빌로니아 남부지역의 고대 지명)인 학자가 쓴 바빌론 역사, 70인 역 성서 등이 나왔다. 특히 70인 역 성서는 '그리스어를 하는 유대인 학자' 72명이 왕의 요청을 받아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학자들은 저마다 자기 방에 72일간 틀어박혀 모세 5경19을 번역했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건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에 탈 때 수많은 원본들도 한꺼번에 소실되었을 것이다. 특히 제노도토스가 따로 분류한 호메로스의 모든 작품들, 갈레노스가 연구하고 입증한 히포크라테스의 저작, 아테네의 위대한 비극 작품들,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토라의 원본 등이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묻는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책이 있는가?" 데메트리오스가 재빨리 대답한다. "폐하, 현재 2만 권의 책이 있습니다. 오, 그러나 소신이 속히 힘을 써서 곧 50만 권에 이르도록 하겠나이다." 여기서 단위의 의미에 주목하자. 두루마리 하나 혹은 한 권(volumen)은 그 자체로 하나의 책이었지만 거대한 저작의 한 장(章)일 수도 있었다. 호메로스의 작품만 해도 두루마리로 48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폴리비오스의 저작이 두루마리 40개, 플라톤의 <국가>가 두루마리 10여 개였다고 한다. 24개의 두루마리로 이루어져 있었던 <오디세이아>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데메트리오스가 말하는 50만 권(50만 개의 두루마리)은 결국 오늘날의 도서 2만 종(種)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p.53 <3장 : 파피루스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