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삼국 중개무역을 장악한 조선통역사 '역관'의 이모저모
◈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거지 행색의 허생에게 선뜻 만 냥을 꿔준 변씨는 역관 출신으로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된 실존 인물이었다.(18쪽)
「허생전」에서 가난뱅이 허생에게 선뜻 만 냥을 빌려주었던 변 부자의 직업은 역관이었다. 변 부자의 할아버지인 숙종 시대 역관 변승업은 지금으로 말하면 천 억 이상의 재물을 가진 부자였다. 그리고 부인이 죽었을 때 감히 왕가의 상제를 행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던 인물이다.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 중인이 양반처럼 선산을 구축한 것은 당시 변승업 집안의 위세를 능히 짐작케 한다. 또한 그의 9형제 중 6명이 역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역관 신분을 대대손손 이어가 280년간 106명의 역관을 배출했다. 역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은 사역원이었는데 이 곳은 역관의 추천을 받아 심사를 통과한 사람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ㆍ현직 역관들이 직접 이들을 심사했다. 이렇듯 천거받기도 어렵고 천거됐다 하더라도 누가 추천을 했느냐에 따라 합격에 상당한 영향이 있었으니 역관은 당연히 세습될 수밖에 없었다.
◈ 세계 최초의 중국어 학습서를 저술한 사람은 조선의 역관이다.(29쪽)
역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관이 공식 직제로 사료에 등장한 것은 고려 충렬왕 2년(1276)으로, 이때 통문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에는 왕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몽고어 역관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몰락하면 그 언어도 쇠락하기 마련, 명이 원을 대체하면서 몽고어 역관도 몰락했다. 이후 조선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면서 주변국들과의 외교가 빈번해지고 교류하는 국가도 늘어났다. 그리하여 중국어, 몽고어, 만주어, 일어, 위구르어, 유구어 등 6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역관을 양성했다. 이들 여러 언어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제작된 외국어 교재로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중국어 학습서인 『노걸대』와 『박통사』가, 일본어 교재로는 『첩해신어』가 있었다. 이들 교재는 해당 외국어를 교육시키기 위한 필요에서 역관이 직접 집필했다.
◈ 역관들은 요즘으로 치면 '투잡스족'으로 외교관이자 국제무역상이었다.(18쪽)
조선 초기에 역관은 통역과 실무만을 맡은 게 아니라 직접 사은사謝恩使라는 공식 외교관 신분으로 중국을 왕래할 정도로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는데, 예종 이후로 사대부들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점점 본연의 통역 임무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국제 무역에서는 조선의 귀한 약재였던 인삼을 중국이나 일본에 판매하여 거액의 돈을 벌기도 했다. 또, 중국과는 다음과 같은 다채로운 무역활동을 펼쳤다.
·여마 무역 - 여마餘馬란 사행 도중에 말이 죽거나 병이 들까봐 예비로 데리고 다니는 말을 뜻하는데, 이 여마에 추가로 물품들을 싣고 가 물건을 사고판 무역.
·회동관무역 - 조선 사신들의 공식 숙소였던 회동관에서 진행했던 무역.
·단련사후시 - 단련사團練使란 사신 일행이 북경에서 돌아올 때 심양 근처까지 가서 일행을 맞아오던 관리를 뜻하며, 단련사후시란 단련사가 우두머리가 되어 일행 뒤로 떨어져 여러 날을 머무르면서 마음껏 물건을 매매하여 돌아오는 말에 싣고 오는 것.
·연복 무역 - 귀국길에 책문 근처에서 행해지는 무역을 뜻하는데, 휴대화물을 복물卜物, 말에 실은 화물을 복태, 화물을 맞이하는 것을 연복延卜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함.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에 기반한 중개무역을 통해 얻은 이익이 가장 컸다. 이 중개무역은 청나라의 해금海禁정책으로 중국이 일본과 직접 교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 중개무역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조선의 역관이었다.
◈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여겨지는 조공이 실제로는 조선의 잇속을 챙기는 국제무역이었다.(46쪽)
중국에 바치던 조공은, 중국에서 한 해에 한 번만 오라고 했는데도 조선에서 억지로 우겨서 세 번이나 갔을 정도로 실제로는 조선이 몇 배나 이익을 보는 무역이었다. 조선의 기본 외교정책에 따라 중국에 대하여 사대를 하였지만 실질적인 내용에서는 조선 경제에 도움을 주는 무역행위였던 셈이다.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한 조선은 중개무역을 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역관은 이런 조선의 입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자신도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 경제까지도 크게 활성화시켰다. 정부는 명분만 앞세우는 사대부들의 등살에 견디지 못하고 역관의 이러한 무역행위를 수시로 금하였지만 이 무역행위로 왕실과 사대부도 큰 이익을 보았으므로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시장의 승리였다.
◈ 은행이 무역업체에 자금을 대출해주고 이익을 얻는 것처럼 조선 관아들은 앞다투어 역관에게 대량의 은을 빌려줌으로써 재정 확충을 도모하였다.(110쪽)
역관들이 조선 제일의 갑부가 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관아의 은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역관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각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중국 물품이 있을 경우, 대금을 받아서 구입하여 관아에 가져다주고 몇 배의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역관의 신분을 빌미로 관아의 은을 빌려 쓸 수 있었다. 이는 관아에서 역관에게 은을 빌려주면 관아도 큰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역관은 외교 사행길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도 자신이 부담했다. 역관 신분을 이용하여 거둔 막대한 부에 비하자면 외교 경비쯤은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 명나라 홍등가에서 기녀를 구출해주고 뒤에 보답받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상도》의 임상옥이 아니라 역관 홍순언이었다.(72쪽)
홍순언은 조선의 역관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역관으로, 역관으로는 드물게 당릉군으로까지 봉해진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가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종계변무' 즉, 명나라의 『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족보를 바로잡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군사를 보내주도록 한 것이다.
일개 역관이 대신들도 하지 못하는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데는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다. 홍순언이 명나라에 갔을 때 하루는 홍등가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억울한 사정으로 몸을 팔아야 했던 중국 여인을 큰 돈을 주고 구해주었는데 그녀가 뒤에 명나라의 재상 석성의 부인이 되었다.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석성이 크게 감동하여 홍순언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성심껏 도와주었고,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된 것도 석성이 애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상도》에서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임상옥으로 표현되었지만 실제 주인공은 역관 홍순언이다. 이 내용은 『통문관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