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실린 글들은 모두 길어야 3개월, 짧으면 한 달의 기간을 두고 쓴 글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 읽어보면 낯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하고 무모한 주장도 많다. 그리고 아직 학문적인 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쓴 글이 많기 때문에 다소 비학문적인, 엄밀하지 못한 개념이나 주장들이 많다는 것도 새삼 느낀다. 학문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구속을 덜 받았고, 사회로부터 직접적인 요청을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지식사회 그리고 사회운동 진영의 문제의식이 곧바로 작업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쓴 몇 몇 무모한, 도발적인 주장들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고, 나의 입지에 역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의 조건에서 나는 써야겠다는 생각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처세`를 위해 하고 싶은 말을 줄일 정도의 `지혜`가 없었다. 그러 나 80년대라는 환경이 나의 20대와 겹쳤고, 또 나름대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글들을 쓴 것 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또 내가 뱉은 말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따라서 여기 실린 글들에 담긴 과거 의 주장을 지금 100퍼센트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완전히 생각을 달리하는 글은 별로 없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비록 지금의 위치에 서 보면 석기시대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글일지라도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그냥 싣기로 했다.
「학술운동론」은 석사논문을 쓴 이후 공개적인 지면에 실은 최초의 글이다. 군에서 제대한 후 별 볼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나 를 어떤 후배가 망원한국사연구실이라는 소장 역사가들의 연구모임에 인도하였는데, 1987년 3월경 그 모임의 내부 발표회에서 「 인텔리와 사회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것을 이후 산업사회연구회측이 『산업사회연구』에 싣자고 하여 다듬어서 실은 것이다. 지금 보면 내용이 다소 투박하고 어색한 부분도 많지만 주장은 매우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나는 알뛰세르(Althusser)가 관념론자이며 그람시(Gramsci)의 이론이 더욱 받아들일 만하다는 생각을 확실히 갖게 되었다. 이 글은 80 년대의 격렬한 분위기에서 운동의 현장을 떠나 연구활동을 하는 것이 사회운동의 현장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고민 하고 있던 동료, 후배 연구자들을 향해 쓴 글이다.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의 과제와 학술운동」은 『경제와사회』 창간호(1988)에 실린 것인데, 앞의 「학술운동론」의 문제의식을 연장 하여 시대의 고민을 함께 안고 있던 동료, 후배 연구자들의 연대와 활력을 촉진하기 위해 쓴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1987년 여름경 누군가가 수집한 한국 현대사 관련 논문들을 편집해서 출간해보라는 제의를 받고 편역한 책에 서문으로 넣은 글이다. 당시 나는 한국 현대사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자는 아니었으나 석사과정 무렵부터 이미 해방정국, 한국전쟁 전후의 공개되지 않았던 현대사 자료들을 읽어본 경험을 갖고 있었고 나름대로 강한 관심과 문제의식을 갖 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이 작업에 뛰어들었다. 이 글에서 나는 당시 막 시작단계에 있었던 사회구성체 논쟁 혹은 사회과학계의 논의를 현대사 연구와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소장 연구자들이 그동안의 왜곡을 거꾸로 돌리려 는 나머지 너무 무리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경향에 대해서도 경계하였다.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1989년 2월 내가 고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전업연구자가 된 후 처음으로 쓴 글이다. 당시 연구는 주로 소장 역사학도들과의 공동연구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이 글은 남한의 역사해석에 대해서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을 견지하는 반면 북한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려는 당시 동료 역사 연구자들의 연구경향을 비판하면서 쓴 것이다 .
「남한 운동사(1945∼64)에 대한 북한의 인식과 평가」는 북한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려는 나의 노력의 일환이었다. 당시 소장 역 사학도들간에는 북한을 거의 일방적으로 미화하려는 분위기가 만연하였는데, 나는 그들과 같이 어울리는 상태에서 당시로는 `힘 겨운` 반론을 폈다.
「4·19혁명에 관한 기존 연구와 그 문제점」은 1990년 4월혁명 30주년을 맞아 그간의 연구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당시 김진균 선 생님이 4월혁명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셨는데, 이 연구소 학술사업의 일환으로 2권의 책이 기획되었다. 필자 선정, 원고 청탁·수 합 과정에서 실무적인 일을 맡고 있던 나는 한길사와 4월혁명연구소를 오가며 이 글을 정리하였다.
「한국의 사회변혁운동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는 한국산업사회연구소의 사회운동 분과에 참여하면서 한국의 제반 저항운동들을 미국식의 주류 사회학에서 논의하는 사회운동(social movement)의 개념과 대비하여 어떻게 개념화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쓴 글이다. 그러나 내용은 순수이론적이라기보다는 당시 운동진영이 한국의 정치경제 현실 및 자신의 노선과 방향을 어떻게 인지 하는지를 주로 검토하고 있다. 앞의 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민족문제, 분단문제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 면서 쓴 글이다.
「레닌주의와 80년대 한국의 변혁운동」은 심혈을 기울여 쓴 글 중 하나인데, 당시 운동권이나 학술연구자들 사이에 만연하던 교 조적 맑스·레닌주의, 도식적인 운동이론에 대한 나의 불편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운동진영에서 유포 된 비공식 팸플릿을 섭렵하였지만 분명한 나의 대안이나 입장이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불충분한 글이 되고 말았다. 이 글 은 무엇보다도 운동가들을 향해 쓴 것인데, 그들의 헌신과 열정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비판과 험담이 쏟아져들어왔다.
(중략)
엄밀하게 말하면 여기에 실린 글들은 나의 이론적 입장을 분명히 정리하는 글이었다기보다는 남의 이론, 주장이나 방법론을 논 평하는 지식사회학적인 작업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지식을 하나의 세력관계, 정치적 역학관계의 산물로 보았고, 따라서 정치현실과 과학을 분리시키려는 경향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지식사회학보다는 지식, 이론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론을 말할 수 없는 시대, 이론을 말하기에는 축적된 것이 별로 없는 사회에서는 지식사회학도 무의미 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 현재에도 나는 여전히 이론이라는 것은 역사 연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역사에 기초를 두지 않 는 이론은 공허한 주장 혹은 기성 이론의 조합 이상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30년 동안의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이 한국을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서게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결함, 즉 독자적인 지식, 사고 방식, 세계관의 부재가 어떻게 향후의 경제성장 그 자체에도 질곡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영화, 대학, 문화는 최고의 고부가가치 산업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자체의 인프라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지 못한 조건에서, 다가오는 21세기에 우리는 무엇을 자산으로 경제와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사회과학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 학문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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