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국립도서관에는 기원전 3350년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집트 파피루스 문서의 두루마리가 있다. 이것은 프랑스의 한 동양학자가 나일 강변 테베의 묘에서 발견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 한다. 이것이 정말 세계 최고(最古)의 책일까.
유럽의 17, 18세기는 '아는 것이 힘이다'는 기치를 내걸고 백가쟁명, 무한담론에 전 유럽이 흥분한 시대이다. "아프리카의 토인도 인류에 속하는가"라는 주제를 내걸고 교양 있는 신사의 전당인 영국의 왕립협회가 3일 동안 심포지움을 벌였을 정도이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무엇인가의 주제를 호학(好學)의 한인(閑人)들이 놓칠 까닭이 없다. 이 문제에 관해 많은 학자와 애서가들이 열띤 담론을 벌인 결과 '세계 최고의 책은 아담이 저술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연구성과는 당연히 구체적이며 믿음직한 고증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17~19세기의 유럽 사람들은 책을 쓰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자가 박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들보다 더 순진하고 양심적인 듯하다. 당시는 백과전서가 지식인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었던 시대요, 박식이 큰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이다.
---pp.100~101
여성이 바로 죄와 타락의 화신이라는 이미지의 밑바닥에는 <창세기> 이브의 이야기가 상징하듯 '유혹하는 여체'관이 도사리고 있다. 죄악의 토포스인 여체는 아름답게 가꾸어져서도 안 되었다.그 미장(美匠)이 스스로를, 그리고 뭇 남성을 도발한다는 논리에서이다. 여인에게 요구된 도덕은 오직 정결과 복종이었고 성처녀 마리아의 무구함이 영원한 거울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여인상은 여성을 집 밖의 세계와 철저히 격리시켰다. 외부 세계 및 공적인 영역은 전적으로 남성의 독차지였다. 젊은 여성들의 교육의 터전은 가정과 수도원이었다. 청빈ㆍ복종ㆍ정결을 내세운 수도원은 당시의 '묶인' 여성들에게는 오히려 자유의 창구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그곳에서 그녀들은 책과 마주하고 지식의 원천인 라틴어를 배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 p.184-186
여기는 당신이 저의 집에서 가장 확실한 터전으로 스스로 선택한 서재가 아닙니까. 당신은 자주 서재에서 저와 함께 신과 인간의 지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p.136
12세기 스콜라 학자 생 빅토르 위그(Huges de Saint Victor, 1096 - 1141)의 학습론은 바야흐로 독서가 개인적 문화행위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지난날 순례로서의 독서에 바쳐진 만가였다. 그의 독서방법을 밝히기에 앞서 먼저 중세의 책과 사본에 관해 살펴보자.
사본공방과 사자생
책이 바로 사본을 의미한 중세에 있어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저서'의 개념이 없었다. 집필활동은 오리지널한 저술활동이기보다는 모자이크의 작성, 기껏하여 '주석'을 붙이는 데 머물렀다. 저자로 말하면 오직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중세의 학자들은 자기들이 연구하고 있는 저술의 저자들에 대해 무관심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저술에도 서명하기를 주저하였다. 당시의 저술에는 표제와 더불어 저자명이 없다. 결국 사본문화는 저자가 없는 '제작자 (왕후나 고위성직자) 중심의 책문화요 수예적 문화였다.
그 책들의 산실은 수도원은 사본공방이다. 중세에는 책이라고 하면 '손으로 씌어진 것' 즉 '사본(매뉴스크립트)'을 의미하였다. 문자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책을 지니지 않는 교회는 무기가 없는 군대와 같다'고 하여 일찍부터 수도원에서 책을 제작하였다. 그것을 본받아 왕들도 궁정에 공방을 차렸으며 13세기 중엽 프랑스의 왕 루이 9세는 사자생의 학교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사본작업은 매우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즉 1. 무두질한 가죽을 돌로 갈고 2. 원본 필사 3. 머리문자와 가장자리의 장식묘사 4. 삽화묘사 5. 원본에 의한 교정 6. 제본의 순서 등이 잘 지켜졌다. 사본의 대상은 <성서>, 미사의 전례서, 교부들의 저작과 함께 그리스 로마의 고전도 끼여 있었다. 한 권의 사본이 책으로 완성되기까지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3백 페이지 정도의 경우 18일 가량 소요되었다. 보통 12명 정도의 사자생들이 나누어서 일했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사본의 제작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공방에는 작업을 하는 이와 고위성직자 이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침묵이 엄격히 지켜져 의사의 전달은 미리 정해진 몸짓으로 하였다. 원래 사자생들은 구술자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쓰거나 아니면 자기가 베끼고 있는 원본을 소리내어 읽으며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다가 9세기경부터 묵독하면서 자업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졌다.
사자생은, 서민은 물론 적지 않은 귀족까지도 문맹자였던, 책이 금은보석처럼 희귀한 당시에는 극히 소중한 존재였다. 7·8세기 아일랜드에서 사자생 살해는 주교 시해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사자생의 대다수는 고대 이집트의 '서기'들과 달리, 필사라는 '기술'을 지닌 일개 하급수도사에 지나지 않았다.
남녀 공동의 수도원 - 중세에는 한때 성직자들도 이성과 '동서(同棲)'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남녀 혼합의 수도원도 있었다 - 에서는 수녀들도 수도사와 책상을 나란히 놓고 사본공방에서 일하였다. 또 필사작업에는 당연히 오기(誤記)가 따랐다. 영어판 <성서>의 어느 사본에는 '그대여 간음하라'고 적혀 있었다. 십계명에서 'not'가 빠졌던 것이다.
춥고 무더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날마다 갈대 혹은 새의 날개뼈로 만든 펜을 오른손에, 작은 칼 - 펜과 칼은 사자생의 상징물이었다 -을 왼손에 꼭 쥐고 책상에 엎드려 할당된 책임량을 채워야 했던 사자생들은 완성된 사본의 말미에 보람의 기쁨과 쌓인 고통, 그리고 불만을 토로하곤 하였다. '성모 마리아여, 사자생을 지켜주소서'. '여기서 이 책은 끝나다. 나의 손은 그것을 기뻐한다.' '펜의 대가로 예쁜 아가씨를 주소서.'
--- p.2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