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금 마시고 나면 당신은 '이게 도대체 뭐지?' 하고 놀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한 모금 더 마시고 나면 '음, 좀 색다르지만 나쁘지 않은걸'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느낀다면, 당신은-확률적으로 단언하건대-아마도 세 모금째에는 아일레이 싱글 몰트의 팬이 되고 말 것이다. 나도 똑같은 단계를 밟았다.
'갯내음이 물씬 풍긴다'는 말은 결코 근거 없는 표현이 아니다. 이 섬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마치 숙명이나 뭐 그런 것처럼 바람이 분다. 그래서 해초 내음을 담뿍 머금은 세찬 바닷바람이 섬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에 선명한 각인을 새겨 놓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해초향'이라고 부른다. 아일레이에 가면, 그리고 얼마 동안 그곳에 머물다 보면, 당신은 그 냄새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 냄새의 정체를 알게 되면, 왜 아일레이 위스키에서 그런 맛이 나는지 체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p.62-63
하지만 위스키를 마시면서 내가 늘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저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 풍경이다. 내게 있어서 싱글 몰트의 맛은 그 풍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바다에서 부는 거센 바람이 파릇파릇한 풀섶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언덕을 뛰어오른다. 난로에는 이탄이 부드러운 오렌지 빛깔을 내며 타고 있다. 알록달록 산뜻한 빛깔을 띤 지붕마다 흰 갈매기가 한 마리씩 내려앉아 있다. 그러한 풍경과 결부되면서, 술은 내 안에서 본연의 향을 생생하게 되찾아간다.
--- p.131
여행이라는 건 참 멋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사람의 마음속에만 남는것, 그렇기에 더욱 귀중한 것을 여행은 우리에게 안겨 준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해도, 한참이 지나 깨닫게 되는 것을.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애써 여행 같은 걸 한단 말인가?
--- p.142
아일레이 섬에 있는 보모어 증류소의 짐 맥퀴엔과 친해진 후, 교외의 들판에 나가 함께 공굴리기 놀이를 했다. 그런 다음 대낮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을 마시고, 산을 넘어 후미진 해변으로 바다표범을 보러갔다(유감스럽게도 그날은 바다표범이 나와 있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짐이 '이거 받아' 하면서 21년 된 보모어 위스키를 한 병 선물로 주었다. 최고급품이다. '도쿄로 돌아가거든, 20세기의 마지막 날 밤에 21세기를 기념해 이걸 따서 마시면 좋을 거야. 마실 때 이 섬에 관한 일을 기억해 줘'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럴 작정으로 집에 고이 모셔 두고 있다. 다른 사람이 마실까 봐 선반 깊숙이 숨겨 두었다. 분명 기막힌 맛이리라.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술이라는 건 그게 어떤 술이든 산지에서 마셔야 가장 제 맛이 나는 것 같다. 그 술이 만들어진 장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다. 물론 와인이나 정종도 마찬가지다. 맥주 역시 그러하다. 산지에서 멀어질수록 그 술을 구성하고 있는 무언가 조금씩 바래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흔히 말하듯이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다. 수송이나 기후의 변화에 따라 실제로 맛이 변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 술이 일상적인 실감으로 조성되어 음용되는 환경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거기에 들어있는 향이 미묘하게, 어쩌면 심리적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도쿄의 바에서 싱글 몰트를 마신다. 내가 자주 가는 바에는 오래된 싱글 몰트 병이 죽 진열되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을 손수 골라 마실 수 있다. 그것은 꽤 근사한 위스키들이다. 이제는 구분하기 힘든, 제법 진귀한 라벨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유쾌해진다. 하지만 위스키를 마시면서 내가 늘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저 스코틀랜드의 작은 섬 풍경이다. 내게 있어서 싱글 몰트의 맛은 그 풍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바다에서 부는 거센 바람이 파릇파릇한 풀섶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언덕을 뛰어오른다. 알록달록 산뜻한 빛깔을 띤 지붕마다 흰 갈매기가 한 마리씩 내려앉아 있다. 그러한 풍경과 결부되면서, 술은 내 안에서 본연의 향을 생생하게 되찾아간다.
아아리시 위스키도 마찬가지다. 어디선가 제임슨가 튤러모어 듀를 입에 댈 때마다,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들렀던 여러 퍼브(pub)를 떠올린다. 그곳에 깃들어 있던 친밀한 공기와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그러고 있노라면 내 손 안에 쥐어진 술잔 속에서 위스키는 조용히 미소짓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여행이라는 건 참 멋진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사람의 마음속에만 남는 것, 그렇기에 더욱 귀중한 것을 여행은 우리에게 안겨 준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해도, 한참이 지나 깨닫게 되는 것을.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가 애써 여행 같은 걸 한단 말인가?
잠깐 정보!
소위 말하는 스카치 위스키는 발아한 보리로만 만들어진 싱글 몰트와 그 밖의 다른 곡물을 증류한 그레인을 블렌딩해서 만들어진다. 아일레이에서 생산되는 대부분 싱글 몰트다. 대표적인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알싸하고 감칠맛 나는 순서대로 꼽아보면 아드벡(20년), 라거부린(16년), 라프로익(15년), 카리라(15년), 보모어(15년), 브루익라디(10년), 브나하벤912년) 등이다.
--- p.139-142
미리 숙소를 정하지 말고,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숙소를 골라 묵는다. 그런 곳은 금세 눈에 뜬다. 근처에 음식이 맛있을 듯한 레스토랑이나 퍼브가 있으면 들러서 맥주를 마시고 저녁을 먹는다. 식전이나 식후에 아이리시 위스키를 한 잔 - 혹은 두잔이어도 좋지만 - 마신다.
"You need cube?(얼음을 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No thanks. With just water, please.(아뇨, 물만 좀 주시면 돼요)" 하고 대답한다.
주인은 "뭘 좀 아는군" 하는 얼굴로 싱긋 웃는다. 그리고는 큼지막한 잔에 아이리시 위스키를 더블쯤 되게 넉넉히 따라 준다(트리플쯤 될 듯도 하다). 술잔 옆에는 물이 담긴 작은 주전자가 딸려 나온다. 물론 수돗물이다. 어설프게 미네랄 워터 같은걸 내놓진 않는다. 수돗물 쪽이 신선하고 훨씬 맛이 좋으니까.
이 고장 사람들은 대체로 위스키와 물을 반반씩 섞어 마신다(이것은 스코틀랜드의 아일레이 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일랜드를 무대로 한 존 포드의 <아일랜드 연풍>이라는 영화 중에서, 상대 배우가 베리 피츠제럴드에게 위스키를 권하며 "물을 줄까? 하고 물으면, "난 말이지, 물을 마시고 싶을 댄 물만 마셔. 위스키를 마시고 싶을 땐 위스키만 마시지" 하고 대답하는, 제법 차밍한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그렇게 마시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파이고 물을 조금 타서 마시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마셔야 위스키가 제 맛이 나거든" 하고 그들은 말한다.
--- pp.99-102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엇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 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언어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일들을 술에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의 다른 무엇인가로 바꾸어 놓고 이야기 하고, 그 한정된 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나는- 늘 그러한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하고.
--- p.25-26
레스토랑에서 생굴 한 접시와 싱글 몰트를 더블로 주문해서, 껍질 속에 든 생굴에 싱글 몰트를 쪼로록 끼얹어서는 바로 입으로 가져간다. 으-음. 정말 환상적인 맛이다. 갯내음이 물씬 풍기는 굴맛과 아일레이 위스키의 그 개성 있는, 바다 안개처럼 아련하고...
--- p.67
그렇지, 머리로만 이러니저러니 생각해선 안 되는 거야. 이런저런 설명은 필요 없어. 가격과도 상관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싱글 몰트는 햇수가 오래될수록 맛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서 얻는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거든. 증류를 해서 더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덜해지는 것도 있어. 그건 다만 개성의 차이에 지나지 않아.
--- p.86
"우리는 장례식에서도 위스키를 마시지" 하고 아일레이 섬사람은 말한다. "묘지에서 매장이 끝나면, 모인 사람들에게 술잔을 돌리고 이 고장에서 빚은 위스키를 술잔 그득 따라주지. 모두들 그걸 단숨에 비우는 거야. 묘지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춥고 허전한 길, 몸을 덥히기 위해서 말야. 다 마시고 나면, 모두들 술잔을 바위에 던져서 깨 버려. 위스키 병도 함께 깨 버리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그것이 관습이거든."
아기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위스키로 축배를 든다. 그리고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위스키 잔을 비운다. 그것이 아일레이 섬이다.
--- pp.69-70
"우리는 장례식에서도 위스키를 마시지" 하고 아일레이 섬사람은 말한다. "묘지에서 매장이 끝나면, 모인 사람들에게 술잔을 돌리고 이 고장에서 빚은 위스키를 술잔 그득 따라주지. 모두들 그걸 단숨에 비우는 거야. 묘지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춥고 허전한 길, 몸을 덥히기 위해서 말야. 다 마시고 나면, 모두들 술잔을 바위에 던져서 깨 버려. 위스키 병도 함께 깨 버리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그것이 관습이거든."
아기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위스키로 축배를 든다. 그리고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위스키 잔을 비운다. 그것이 아일레이 섬이다.
--- pp.6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