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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으로 보는 금강경

공으로 보는 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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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8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126쪽 | 260g | 153*224*20mm
ISBN13 9791185038162
ISBN10 118503816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 여기서 세존이 설한,「중생을 제도했는데 제도한 중생이 없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이것은 중생은 본래 중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원래는 중생이 아닌데도 그 사실을 중생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기에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하여 제도해도 본래 제 모습에서 변한 것이 없는바, 결과적으로 제도한 것이 없게 된다.「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과 상통하는 대목이다. (22p)

* 사실 깨달음을 통해 중생이 부처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너무 생각[분별]에 집중하다 보니 깜빡 자기 자신을 잊은 것이 중생이고, 그렇기에 깨달아 부처가 된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 중생 흉내를 내던 부처가 그것을 멈추고 본래의 청정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22p)

* 깨달음을 단번에 깨칠 수 있다면 四相이란 것은 애초에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사실 세존과 같은 타고난 성자가 아닌 한 누구나 단계별 접근을 할 수밖에 없다. 계단을 밟듯 차근차근 깨달음을 향해 올라야 하는데, 그 과정이 바로 四相이다.
그렇다면 수행을 하면서 의식이 성장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떠올려 보자. 그것이 과연 四相과 잘 맞아떨어질 것인지….
깨달음에 관심 없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을 보면 어떨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나’ 위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아무튼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낮은 단계의 영성靈性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인생이란 무대의 주인공이다. 이점은 수행자가 됐다고 해서, 아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크게 변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나’ 외의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인데, 이 차이에 의해 四相은 명확히 구분된다.
외계의 모든 것을 ‘나’의 삶을 위한 들러리, 다시 말해 엑스트라(extra) 정도로 본다면 아집이 남달리 센 경우라 하겠다. 이렇게 ‘나’에 대한 집착이 유달리 강한 일반적 성정性情을 일러 我相이라 한다.
이제 我相을 지닌 자가 時空의 한계를 느끼고 수행이란 것을 시작했다고 치자. 사마타로 분별을 지우고 위빠사나로 분별을 초월하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에 대한 집착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주변을 보면 그들은 엑스트라(extra)가 아니라 조연급으로 성큼 자라나 있을 것이다. 엑스트라는 없으면 그만이지만 조연은 다르다. 그것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주연인 ‘나’의 위치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절로 주변과의 관계에 애정을 쏟게 되고, 쌓였던 벽은 봄눈 녹듯 하여 원활한 관계망이 형성된다. ‘나’와 ‘남’을 비슷한 선상에서 바라볼 줄 알게 된 것으로, 이런 정도의 의식 수준을 일러 人相이라 한다. 人相은 글자 그대로 人(남)이 ‘나’의 심중에 자리 잡게 됐다는 뜻이다.
人相이 되면 그만큼 의식의 時空이 넓어진 것이다. 여기서 더 수행에 정진하면 ‘나’와 ‘남’으로 견주는 것을 넘어 물아일체의 경계까지 들어간다. 이때 空에 대한 이해가 부쩍 깊어지면서 ‘나’와 ‘남’이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라는 관념이 생겨난다. 이렇게 의식이 더욱 커지고 나면, 좁은 時空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남’들의 삶이 우매하거나 측은하게 다가온다. ‘나’가 깨달음에 성큼 다가서다 보니 ‘남’이 지닌 중생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이때부터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로 나누어 보는 관념이 싹트고, 그래서 이런 경지를 일러 衆生相이라 한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주인공이니 조연이니 하는 겉치레에 둔감해지고 오로지 작품[창조성]과 연기[가치와 보람]만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衆生相에서 더욱 수행에 정진하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空 아닌 것이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나’를 포함하여 모든 것은 그저 時空이란 무대에서 空이 有力과 無力을 번갈아 일으키며 정보 놀음을 펼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감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정보의 이합집산으로 보게 되는데, 이런 경지를 일러 壽者相이라 한다.
壽란 생명을 지닌 존재에게 부여된 시간을 말하며, 그 속엔 공간이란 개념도 더불어 포함된다. 그래서 壽者相에 이르면 時空에 놓여진 정보에 보다 주목하게 되고, 자연히 주연, 조연, 작품, 평가… 같은 개념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시나리오라는 정보만 휑하니 남아 있게 된다. 정보만 남아 時空을 가득 메우는 상태, 바꿔 말해 空으로만 보고 듣고 해석하게 되는 의식 상태가 되는 것이다.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은 이처럼 수행의 진전에 따른 의식의 성장 과정을 구분한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중생이 거쳐야 할 필수 단계이며, 그렇기에 수행자라면 필히 四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24p)

* 불교에서는 그 답으로 空을 제시한다. 空이란 有도 아니고 그렇다고 無도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한 제3의 존재 형태이다.
空이 有에도 속하지 않고 無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참된 존재인지 한번 궁구해 보자. 존재에는 세 가지 경우수가 있을 것이다. 有와 無, 그리고 空이다. 이 가운데 실존實存이 무엇일까?
깨달은 세존의 눈엔 有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無 역시 마찬가지이다.(32p)


* 有와 無가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면 그 어떤 정신적 경지를 거론해도 중생이다. 수행을 천년만년 지속하고 이치와 반야에 막힘이 없어도 중생이다. 왜냐, 중생과 부처의 구분은 有·無로 보느냐 空으로 보느냐에 따라 확연히 갈라지기 때문이다.
수행? 그리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다. 有와 無와 空만을 가지고 화두로 삼고, 이 셋의 묘리를 깨닫는 과정에 묵조선이나 사마타, 위빠사나, 간화선… 등의 수행을 보조적으로 취해 쓰면 된다.
묵조선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었어도, 사마타를 통해 일체의 분별에 장막을 드리웠어도, 위빠사나를 통해 외계와의 순수공명을 이루었어도, 간화선을 통해 이치에 막힘이 없어도 실존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이 없으면 중생일 뿐이다.
깨달음, 그것은 삼라만상 모든 것이 존재하는 참된 모습을 통찰하여 그 답을 얻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有·無·空의 세 주사위를 던지며 반야를 증득하는 것보다 더 단순하고 확실하고 빠른 길은 없다. (33p)

* 왜 불법은 無爲의 法이어야 하는가?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제도해야 할 중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끌어 완성할 것도 없고 그냥 내버려 둘 것도 없다. 삼라만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자체가 실존實存인 까닭이다. 따라서 부처는 無爲에서 法을 설한다. 無爲라는 본처에서 法이라는 분별을 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는 성聖으로도 보이고 속俗으로도 보인다. 어떤 때는 고고한 학처럼 거룩하면서도 어떤 때는 흔하디흔한 참새처럼 범속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는 법法과 속俗 모든 것에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실존과 허상, 절대와 상대, 통합과 분별···등의 모든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40p)

* 부처는 분별을 초월하여 절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절대라는 또 다른 분별에 갇힌 꼴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부처의 位는 분별과 절대를 한꺼번에 초월하여 분별과 절대에 함께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法이면서 非法이고, 法도 아니고 非法도 아니게 된다. 이쯤 되어야 가히 해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가 탄생한 이유는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여 영생과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다. 이것은 현실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더 높은 차원의 정보를 습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44p)

* 그래서 세존은 시종일관 法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분별에 의해 왜곡될 것을 우려하여 非法을 빼놓지 않고 거론한다. 불법이 불법이 아니어야만 불법이 되는 이치, 바로 불법에 대한 분별심마저 초월하여 法을 전하라는 무소전법無所傳法의 가르침이다. (45p)

* 아라한이란 삼라만상을 시간과 공간으로만 보는 경지이다. 사다함에서 거울을 들고 삼라만상을 비추고 있다고 한다면, 아나함은 거울을 당겨 삼라만상과 일체가 되어 바라보는 경지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나함에서의 거울(共鳴)이 쓸모없게 돼 버리는데, 이런 경지를 아라한이라 한다. 거울이 없이도 一心과 하나로 존재하는 상태, 이쯤 되면 일체의 분별이 사라지고 절대 평등에 머무르게 되어 부처라 이를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이런 아라한의 경지 또한 아직은 중생이라고 단언하셨다. 왜 그런 것인가? 아직 그 이상의 단계, 즉 열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50p)

* 깨달은 부처의 눈엔 삼라만상 어느 것도 空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되면 중생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중생이라고 착각하는 것들만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부처들이 깊은 착각의 늪에 빠져 스스로 중생이라 생각하게 된 것인가? (55p)

* 그런데 어떤 중생이 불법을 통해 자신이 바다임을 깨달았다고 치자. 이때 변한 것은 무엇인가?
물방울이 바다로 변한 게 아니라, 물방울은 원래부터 바다였다. 바다가 정보의 파도를 일으키면서 발생한 낱낱의 현상이 물방울일 따름이다. 따라서 물방울이 바다로 바뀐 게 아니라, ‘별개의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털어냈을 뿐이다. 이는 불법을 통해 물방울(중생)을 바다(부처)로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세존의 입에서 ‘중생을 제도했지만 제도한 중생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56p)

* 중생은 부처가 되고 싶고 부처는 중생이 되고 싶은 것, 이것이 우주가 생겨먹은 본래 모습이다. 부처와 중생이 돌고 돌아 한 덩어리로 공존하는 모습, 이것이 실존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이래서 성립되는 것이다. 응무소주應無所住라는 바다에서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는 물방울을 일으키며 피아의 구분 없이 한 생명으로 둥글어 가는 모습, 이것이 깨달은 부처의 모습이다. 이런 공존의 미학을 가르쳐, 나고 죽음이 없이 열반의 가치를 일러주는 것이 불법이다.
그래서 불법을 일러 「영생을 이루어 열반에 이르는 가르침」이라 한다. 즉 영생과 열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취하려는 수행인데, 바로 응무소주應無所住라는 바다에서 영생이,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는 물방울에서 열반이 나오게 된다. 이 둘 사이의 분별 자체도 사라져 들숨과 날숨처럼 한 호흡의 생명으로 화해 영존하는 것, 이것이 여래如來이다. (56~57p)

* 불교의 주된 관심사는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이다. 전자를 취해 영생을 얻고 후자를 통해 열반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다. 그렇기에 이런 시각에서 보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 채운들 그것이 크게 느껴질 리가 없다.
불교는 오로지 깨달음에 관계된 것이어야만 그것의 가치를 높이 친다. 그 어떤 물질을 가지고는 불법에 추호도 견줄 수 없다. 그래서 재시財施는 그것의 규모에 관계없이 법시法施에 비해 부족하다. 사실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열반을 물질로써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재시란 법시를 펴는 과정에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방편의 일종일 따름이다. (60p)

*『금강경』의 관점에서 보면, 대승과 소승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옳을 것인가? 아마 이런 질문을 세존에게 했다면 크게 꾸중을 듣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 그런 질문 자체가 커다란 분별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은 대승이냐 소승이냐, 그 외에 어떤 종파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일체 분별의 족쇄를 끊고 해탈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방편에 마음을 두는 것은 들숨과 날숨을 견주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61p)

* 이런 이유로 세존의 설법은 뭔가 해답을 주면서도 결국엔 그 해답마저 부정한다. 중생들에게 불법의 동아줄을 길게 내려주면서도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떼는 것이다. 왜냐, 불법이 중생구제의 동아줄이 되기 위해서는 그 실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69p)

* 이렇게 말하면 불교 수행이 꽤나 복잡하고 지난한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구조는 매우 단순명료하다. 자신이 실존이라는 사실 하나만자각하면 부처가 이룬 경지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존이 왜 성립되는지에 대한 온전한 각성을 통해「나 = 佛」의 등식을 완성하면 된다. 이 등식 하나를 이루기 위해 불교는 존재한다. (73p)

* 有란 것은 無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길고 짧은 것이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有와 無는 공존하며 이것을 空이라고 부른다. 空의 인연에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有이다. 그래서 有란 것은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있지 않은 환유幻有이다. (83p)

* 이처럼 지각과 인식의 차이에 의해 부처와 중생은 나뉘고, 이런 이유로 「부처의 눈엔 부처만 보이고, 중생의 눈엔 중생만 보인다」는 말도 나오게 된다. 실제로 깨달은 자의 눈엔 중생이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도할 대상이 없고 제도하기 위해 쓰는 法이란 것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空이면서 열반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처처럼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성불의 지름길을 묻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세상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억지로 비교하자면 눈꺼풀을 한 번 내렸다 올리는 정도랄까.
길을 걷다가 한쪽 모퉁이에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광경을 떠올려 보자. 고운 빛깔과 그윽한 향기에 취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했다. 중생이란 바로 이런 상태이다. 부처가 촌각의 시간 동안 분별에 빠져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부처로 돌아가려 애쓰지 않아도 감상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원 모습을 되찾게 된다. 얼마 뒤 나그네가 들꽃에 흥미를 잃고 가던 길을 계속 가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촌각의 시간이 우주의 시간대로 보면 너무 길다. 그래서 분별에서 미리 빠져 나오려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그중 극히 일부가 성공하여 부처가 되었다. 나그네의 원 모습이 된 자는 다른 나그네들이 들꽃에 심취해 있는 광경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질까? 부처들이 잠깐 동안 분별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인데, 이런 걸 가지고 중생구제니 대오각성大悟覺性이니 정혜쌍수定慧雙修니… 하며 그들의 손을 잡아 끌 것인가?
부처의 눈엔 중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잠시 분별에 집중하고 있는 부처들만 있을 뿐이다. 그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분별에 너무 빠지다 보니 스스로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적당히 감상하다 시선을 돌리면 되는데, 그 방법을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분별에서 그만 머무르라며 잔소리 몇 마디 하게 되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불법이다. 그래서 불법의 실체가 딱히 뭐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식에 의한 난해함을 잔뜩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는 딱 한마디 한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세상에 불법만큼 쉬운 건 없다. 그 말에 정신을 차려 원래의 모습, 부처로 돌아오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너무 쉽다 보니 정신 차리는 자들이 거의 없게 된 것이다.
가령, ‘나는 누구인가?’ 화두 하나만 풀어도 정신이 차려진다. 부처의 본래 모습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쉬운 화두를 푸는 이는 거의 없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깨달았다는 숱한 고승들 역시 그 실체를 해부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다.
한 소식 들었다는 수행자들의 말을 보면,「답이 없다」, 「無이다」, 「문제가 잘못됐다」, 「나는 부처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원하다」,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건 가아假我이다. 진아眞我는 空이며 그래서 부처이다」, 「나는 일종의 정보덩어리다. 정보가 흩어지며 진짜 나가 남는다. 그것은 삼라만상의 바탕이며 부처의 본래 모습이다」… 등등 짧고 긴 수많은 답을 낸다. 하지만 이런 식의 답을 백날 한들 깨달음이란 없다. 분별의 조합을 통한 답은 그것이 정답과 일치를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세존은 이미「중생=부처」라는 답을 내렸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의 답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들이 된다. 하지만 들꽃을 감상하고 있는 나그네가 수만 번 ‘나는 부처이다’를 외친들 그게 깨달음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분별 속에서 분별을 가지고 풀어서는 화두의 답을 얻을 수 없다. 중요한 건 그가 들꽃에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고개를 돌려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큼 쉬운 건 없다. 이것을 못 하는 이유는 분별의 문제를 분별로써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행자의 발목을 잡는 가장 커다란 요인이며, 그래서 세존이 본 경經을 통해 모든 분별을 걷어낼 것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응무소주應無所住하여 찰나만 분별을 멈춰도 견성하고, 이생기심而生其心하여 그것에 조금만 숙달돼도 성불인 것을, 언제쯤이나 들꽃 향기에서 벗어날 것인지….(94-95p)

*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상대와 대비되는 절대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대와 거리를 두는 절대는 그 자체로 절대성을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무소주應無所住 뒤에 이생기심而生其心이 따라붙고, 색즉시공色卽是空이며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상대와 절대 자체에도 걸림이 없게 되어 진정한 해탈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특출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그 무엇보다 평범하게 된다. 앞서 「깃발에 얽힌 선문답」에 나온 밭 가는 농부처럼 말이다. 흔히 평범하기에 중생이라 하지만 중생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알고 보면 중생만큼 독특하고 유별난 존재도 없다. 왜냐, 아상我相이 큰 것에 비례해서 자신만의 특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범은 부처만이 누릴 수 있는 경지이다.
삼라만상이 한 덩어리가 되어 분별이 종식될 때 비로소 해탈하여 평범한 경지, 대각大覺에 이르게 된다. 평범···, 그것은 삼라만상 모든 것이 다 부처가 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에서 나온다. 성聖과 속俗에 구애됨이 없이 무위無爲로 둥글어 가니, 절대絶對이고 참된 부처의 자리이다. (99p)

* 부처는 상대계와 절대계의 구분마저 초월하여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경지에머무른다. 그래서 부처는 어떤 때는 중생이고 어떤 때는 부처가 된다. 중생과 부처에 대한 분별이 전혀 없기에 해탈이라 한다. 이처럼 일체의 분별이 없는 부처이기에 제도할 중생이 없고 그들을 제도할 法도 없다. 그러니 얻을 깨달음이란 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세존은 수보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비구들을 모아 놓고 法을 설하고 있는가? 그 자체로 法에 대한 인식도 있고 중생 제도에 대한 원력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103p)

* 악몽은 그것이 꿈인 줄 알면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중생살이의 고통도 깨어나 환상이었음을 알면 사라진다. 생로병사에 대한 두려움도 자신이 영존永存하는 실존임을 알면 사라진다. 그래서 깨고 보면 모든 것이 즐거움뿐이다. 모든 성인들이 한결같이 깨어나라고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컨대 깨면 초월이요, 잠들면 얽힘이다. 얽힘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으니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 깨어나는 길뿐이다. 깨어 나서 존재 가치를 영원히 이어 나가는 자를 여래如來라 하고, 모든 중생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세존의 법문은 거듭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법문을 들으면 들을수록 法이 사라지고 非法 역시 감춰진다. 그래서 세존의 法은 가히 깨달은 자의 法이며, 추호의 어긋남도 없는 진리의 法이다. (107p)

* 불교에서는 有와 無의 존재를 부정한다. 有와 無로 가르면서 일체의 분별이 시작됐고, 소위 말하는 중생이란 것도 여기서 생겨났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은 有·無와의 한판 씨름이다. 有·無를 갈라서 보느냐, 아니면 有·無를 일체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깨달음의 성패는 나뉜다. 후자를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空이다.
그렇다면 空으로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111p)

* 수행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한때 돈오頓悟 뒤에 점수漸修냐 돈수頓修냐를 가지고 적잖은 논쟁이 붙기도 했지만, 사실 돈오돈수頓悟頓修·돈오점수頓悟漸修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대로 돈오가 됐냐는 것이다. 돈오가 사실이라면 뒤에 따라 붙는 수식어는 이생기심而生其心에서 발생하는 방편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다도 된다. 깨달은 뒤에 달마처럼 고고한 경계를 두드리든, 원효처럼 저속한 경계를 넘나들든, 그건 상대계라는 캔버스 위에 분별의 붓질이 남긴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114p)

* 나를 가치 있게 하는 지혜를 불교에서는 반야般若라 한다. 반야란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한지를 바로 아는 견식을 말한다. 따라서 반야는 나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인도하게 된다. 그 방향이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피조물이 지닌 시공時空의 한계에서 벗어나 실존화實存化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피조물에서 조물주로 거듭나는 일이다. 세상에 이것만큼 더 이롭고 가치 있는 것이 있을까?
흔히들 실속을 차리라는 말을 하는데, 진짜 실속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 외에는 없다.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살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살든 깨달음의 길을 걷지 않으면 그 결말은 허무일 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압박에서 오는 두려움에 떨다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지거나, 어쩌다 종교라는 진통제를 맞고 괴로움을 일순 견뎌낸다 해도 약효가 빠진 뒤에 찾아오는 더 큰 고통에 신음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118P)

* 그런데 그 깨달음이란 것은 실체가 없다. 왜냐? 실존이란 것이 有도 아니고 그렇다고 無도 아닌 空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空을 가르치는 불법의 실체 역시 없다. 세존은 귀중한 시간을 쪼개 경經을 설했지만 法의 실체가 없는 까닭에 설한 바가 없다. 그래서『금강경』이 이렇게 책으로 엮어져 있지만 그 실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空일 뿐이다. (119p)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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