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편지를 우편함에 넣을때만해도 다른 편지를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아무런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고 어떤 미래도 겨냥하지 않았으며 그냥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 남자들이 더 이상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의기소침해진 상태에서 그녀를 당장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반응이 어떠할지 미리 상상해 보려고 들지도 않았다. 굳이 상상을 햇다면, 만약 그녀가 그에게 편지를 보여주며 <이봐요!남자들이 나를 아직은 잊지 않았네요!>라고 말하면 시치미를 떼며 낯선 이의 찬사에 자기의 찬사까지 덧붙이리라는 상상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마침표가 없으니 연속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p.102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용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야.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며 이 물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인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야.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란 우리가 자아를 비춰볼 수 있도록 그들이 이따금 거울의 윤을 내주는 것일 뿐이야.
--- p.51
'세상에 외따로 떨어져 사랑하는 두 존재, 그건 아주 아름답지.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 p.88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리고 항상 똑같은 놀람: 그녀와 다른 여자들과의 차이가 그렇게 미미한 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그는 방문을 열었다. 마침내 그녀를 보았다. 이번에는 털끝만치도 의심할 바 없이 그녀이지만 그런데 더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그녀 얼굴은 늙게 변했고 눈길은 이상하리만치 험상궂었다. 마치 해변에서 그가 손짓을 보냈던 여자가 이 순간부터 영원히 그가 사랑하는 여자로 탈바꿈한 듯했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그의 무력함에 대해 징계라도 받아야만 하는 것처럼.
'무슨 일이 있었지? 웬일이야?'
'아무일도 없어요'
'뭐라고? 아무 일이 없었다니? 당신이 몰라보게 달라졌잖아'
'잠을 설쳤어요.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그리고 아침 나정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요'
'나쁜 일이라니? 왜?'
'그냥 그랬어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말해 봐'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요'
그는 계속 추궁을 했고 그녀는 마침내 털어놓았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할수 없어서 몽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 p.
누가 꿈을 꾸었는가? 누가 이 이야기를 꿈꾸었는가? 누가 상상해 냈을까? 그녀가? 그가? 두 사람 모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현실 속의 삶이 이런 뻔뻔스런 환상으로 변형되었을까? 열차가 영불해협아래로 들어갔을 때? 그보다 일찍? 그녀가 그에게 런던행을 선언했던 아침일까? 그보다 더 먼저일까? 필적 감정사 사무실에서 그녀가 노르망디 카페의 남자 종업원을 만난 그날부터? 아니면 그보다 더 먼저일까? 장-마르크가 그녀에게 첫번째 편지를 보냈던 때였을가? 하지만 그가 정말 그 편지를 보냈을까? 아니면 단지 상상 속에서만 썼을까?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경계선이 있을까?
--- p.176
그리고 나는 자문해본다: 누가 꿈을 꾸었는가? 누가 이 이야기를 꿈꾸었는가? 누가 상상해냈을까? 그녀가? 그가? 두사람 모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현실 속의 삶이 이런 뻔뻔스런 환상으로 변형되었을까? 열차가 영불해협 아래로 들어갔을 때? 그보다 일찍? 그녀가 그에게 런던행을 선언했던 아침일까?
그보다 더 먼저일까? 필적 감정사 사무실에서 그녀가 노르망디 카페의 남자 종업원을 만난 그날부터? 아니면 그보다 더 먼저일까? 장-마르크가 그녀에게 첫 번째 편지를 보냈던 때였을까? 하지만 그가 정말 그 편지를 보냈을까? 아니면 단지 상상 속에서만 썼을까?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경계선이 있을까?
--- p.176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멍허니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들이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아서 슬프다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난 뭐야? 난 말이야? 당신을 찾아 해변을 수킬로미터씩 헤맸고, 울면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고, 당신을 따라 지구 끝까지라도 뛰어갈 수 있는 나는 뭐지?
--- p.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