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 해양 공화국
아르노 강 하구에 있는 피사는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처럼 에트루리아, 그리스 · 로마의 발자취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피사가 번영하는 도시가 된 것은 11세기가 되어서였다. 피사는 1차 십자군 원정의 항구로서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 발레아르 군도를 장악했다.
큰 해양 공화국들 사이의 대립이라는 복잡한 이해 관계에서 피사는 베네치아, 제노바와 맞서야 했다. 특히 제노바는 피사와 지중해에서 패권ㅇ르 다투었고, 1284년 멜로리아 섬의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피사는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경제적으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 1405년 피렌체의 지배하에 놓이기 전까지 1세기가 넘게 자치권을 유지했다.
기적의 광장
이 시기에 피사에는 세상에서 유일한 일련의 기념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피아차 데이 미라콜리'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질 만했다. 평면이 완벽한 비율의 라틴 십자가 모양인 대성당은 2세기 이상(1063-13세기 말)에 걸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일체감을 준다.
근처에는 중세 때부터 이 도시를 유명하게 한 기울어진 종탑이 있다. 지반의 침하로 기울어진 이 탑은 섬세한 아케이드로 된 6개의 회랑이 층층이 쌓여 있다. 제일 위에는 음계의 일곱 음으로 조율된 7개의 종이 달린 종각 모양의 작은 탑이 있다.
대성당 포오치를 향해 있는 세례당은 12세기 중반부터 14세기 말까지 만들어졌고, 위풍당당한 쿠폴라가 있는 3개의 층은 고딕 양식으로 장식되었다. 이 훌륭한 전체 건축물들을 완성시키는 캄포산토는 높은 벽으로 예전의 묘지를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은 이 묘지를 1200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무덤에서 가져온 흙으로 덮었다. 십자군 병사들을 수송하는 배의 선창 안에 이 흙을 실어왔는데, 이 흙은 하루 만에 시체를 해골로 변화시키는 특성이 있다고들 했다.
피사가 항구도시였을 때
성지(그리스도가 살았던 땅)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피사는 아르노 강 하구에 세워진 작은 교회 산타 마리아 델라 스피나 또한 보존하고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가시 왕관이 들어있는 작은 성소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산토 세폴크로 소성당도 보존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예수 성지의 성유물들을 보관했다. 피사는 더 이상 항구가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이 건축물들은 피사의 해양 공화국 시대를 떠올린다. 해양 공화국은 모든 지방 주민들에게 성공을 안겨주었고, 이탈리아에게는 지중해의 지배권을 부여하였으며, 이따금 패권을 뺏으려는 회교도들만이 이탈리아와 패권을 다투었을 뿐이다.
선박들은 당시의 항구 제노바 · 피사 · 아말피 · 베네치아에서 동양과 이집트로 떠났으며, 12세기부터는 리스본 · 런던 · 브뤼헤로 출항했다. 이렇게 하여 유럽 남부와 북부는 접촉하게 되었고,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가 말한 것처럼 더 멀리까지 수평선이 열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형제를 중국 황제에게 데리고 간 이 위대한 여행자 마르코 폴로는 극동 지방에서 1291년까지 체류했고 1295년에야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1298년 제노바인들의 포로가 된 그는 3년간의 감금생활동안 감방 동료 루스티켈로 다 피사에게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받아쓰게 했다. 베네치아어가 섞인 프랑스어로 된 이 육필 원고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서 15세기의 유명한 항해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 pp.44-45
피사, 해양 공화국
아르노 강 하구에 있는 피사는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처럼 에트루리아, 그리스 · 로마의 발자취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피사가 번영하는 도시가 된 것은 11세기가 되어서였다. 피사는 1차 십자군 원정의 항구로서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 발레아르 군도를 장악했다.
큰 해양 공화국들 사이의 대립이라는 복잡한 이해 관계에서 피사는 베네치아, 제노바와 맞서야 했다. 특히 제노바는 피사와 지중해에서 패권ㅇ르 다투었고, 1284년 멜로리아 섬의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피사는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경제적으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 1405년 피렌체의 지배하에 놓이기 전까지 1세기가 넘게 자치권을 유지했다.
기적의 광장
이 시기에 피사에는 세상에서 유일한 일련의 기념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피아차 데이 미라콜리'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질 만했다. 평면이 완벽한 비율의 라틴 십자가 모양인 대성당은 2세기 이상(1063-13세기 말)에 걸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일체감을 준다.
근처에는 중세 때부터 이 도시를 유명하게 한 기울어진 종탑이 있다. 지반의 침하로 기울어진 이 탑은 섬세한 아케이드로 된 6개의 회랑이 층층이 쌓여 있다. 제일 위에는 음계의 일곱 음으로 조율된 7개의 종이 달린 종각 모양의 작은 탑이 있다.
대성당 포오치를 향해 있는 세례당은 12세기 중반부터 14세기 말까지 만들어졌고, 위풍당당한 쿠폴라가 있는 3개의 층은 고딕 양식으로 장식되었다. 이 훌륭한 전체 건축물들을 완성시키는 캄포산토는 높은 벽으로 예전의 묘지를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은 이 묘지를 1200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무덤에서 가져온 흙으로 덮었다. 십자군 병사들을 수송하는 배의 선창 안에 이 흙을 실어왔는데, 이 흙은 하루 만에 시체를 해골로 변화시키는 특성이 있다고들 했다.
피사가 항구도시였을 때
성지(그리스도가 살았던 땅)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피사는 아르노 강 하구에 세워진 작은 교회 산타 마리아 델라 스피나 또한 보존하고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가시 왕관이 들어있는 작은 성소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산토 세폴크로 소성당도 보존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예수 성지의 성유물들을 보관했다. 피사는 더 이상 항구가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이 건축물들은 피사의 해양 공화국 시대를 떠올린다. 해양 공화국은 모든 지방 주민들에게 성공을 안겨주었고, 이탈리아에게는 지중해의 지배권을 부여하였으며, 이따금 패권을 뺏으려는 회교도들만이 이탈리아와 패권을 다투었을 뿐이다.
선박들은 당시의 항구 제노바 · 피사 · 아말피 · 베네치아에서 동양과 이집트로 떠났으며, 12세기부터는 리스본 · 런던 · 브뤼헤로 출항했다. 이렇게 하여 유럽 남부와 북부는 접촉하게 되었고,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가 말한 것처럼 더 멀리까지 수평선이 열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형제를 중국 황제에게 데리고 간 이 위대한 여행자 마르코 폴로는 극동 지방에서 1291년까지 체류했고 1295년에야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1298년 제노바인들의 포로가 된 그는 3년간의 감금생활동안 감방 동료 루스티켈로 다 피사에게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받아쓰게 했다. 베네치아어가 섞인 프랑스어로 된 이 육필 원고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서 15세기의 유명한 항해자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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