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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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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그랬지. 인간사 한 바퀴가 일륜인데 백 년 걸리지. 우리는 모두 한 바퀴도 못 돌고 내리는 셈이 아닌가.
백 년 뒤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모두가 새로운 사람들일 것이다.--- p.27 온 세상의 고향이 다 사라졌어요. 내 말에 김선배는 먼바다 쪽을 내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았다. 그거 다 느이들이 없애버렸잖아.--- p.28 흔히들 첫사랑은 만나고 나면 후회한다는데 피차에 늙고 볼품없어져 만난다 해도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상대방에게 실망할 처지가 아니다. 우리가 살았던 달골이 지상에서 이미 사라진 기억 속의 박제에 지나지 않듯이,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p.102 나는 이미 망가져서 더 망가질 것도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게 내 방식으로 그를 보내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거리에서 그와 헤어지고 나는 버스 타는 것도 잊고 몇 정류장인가를 그냥 걸었다. 울면서 걷는 나를 지나가는 행인들이 힐끔힐끔 보면서 스쳐갔다. 나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잘 가라 박민우, 넌 나한테 짤렸어. 그날 나는 그렇게 그를 보냈다.--- p.171 우리가 뭔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가냘프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아들이 일터에서 해고되고 각종 알바일을 전전하다가 지난해 겨울에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고 적고 있었다. 여기까지 불과 한 시간 남짓 걸린 것 같다. 수십 년에 걸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나의 한 시간과 함께 과거 속으로 흘러갔다.--- p.175 아, 잊었네요. 나는 내 아이의 이름을 민우라고 지었습니다. 김민우. 나는 그애가 우리처럼 어렵고 가난해도 행복했으면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왜 우리 애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 p.176 컴퓨터에 지도를 띄워놓고 새로운 주택 부지를 찾으며 맞춤한 곳에 집 짓는 상상을 하는 게 요즘의 내 유일한 낙이다. 그런데 그 집에는 함께할 가족이 없다.--- p.195 나는 길 한복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 p.195 |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 거리에 서면, 문득 주위가 적막에 잠기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은 물결처럼 흘러가고 나 혼자 여기 서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나는 무얼 바라고 왔는지, 쉴 새 없이 달려왔으나 돌아보니 걸어온 자리마다 폐허.
거장 황석영이 신작 장편소설 『해질 무렵』으로 돌아왔다. 장편소설 『여울물 소리』 이후 3년 만이다. 성공한 건축가 박민우는 인생의 해질 무렵에 서서 길 위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돌아보며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본다. 더는 변화할 무엇도, 꿈꿀 무엇도 없을 것 같은 그의 일상에 ‘강아지풀’ 홀씨 하나가 날아든다. 그 작은 씨앗은 그가 소년시절를 보냈던 산동네 달골, 아스라한 그 시절 가슴 설레게 했던 소녀를 불러오고 달골에서 함께 부대끼던 재명이형, 째깐이, 토막이, 섭섭이형 같은 사람들을 불러내어 견고하게만 보이던 그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젊은 연극연출가 정우희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산다. 그녀는 음식점 알바와 편의점 알바를 뛰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연극무대에 매달린다. 암담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사랑을 꿈꾸기도 하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그럴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척박한 세상에 지쳐 젊은 날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검은 셔츠’... 이 소설은 짧은 경장편이다. 하지만 이 짧은 소설에 담긴 생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이 도저하고, 여기에 담긴 이야기는 어느 장편소설보다 지평이 넓고 풍부하다. * 작가의 말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은 함께 흔적을 남기지만, 겪을 때에는 그것이 원래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지난 세대의 과거는 업보가 되어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었다. 어려운 시절이 오면서 우리는 진작부터 되돌아보아야 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