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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

리뷰 총점8.0 리뷰 4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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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86쪽 | 438g | 153*224*20mm
ISBN13 9788982814303
ISBN10 898281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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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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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방은 여전히 엘라의 쇼핑백을 나누어 들지 않는다. 좁은방은 엘라 역시 '오브제'와 '미샤'와 '리씨'와 '에콜 드 파리'와 '레노마'와 '보브'와 '스테파넬'과 '아니베 에프'와 '아나카프리'와 '나이스 클랍'과 '톰보이'와 '에녹'과 '롤롤'과 '쇼비즈'와 '시스템'이 무슨 뜻을 가진 낱말인지 결코 알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좁은방은 엘라가 그 뜻을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걸 역시 알지 못한다. 첫번째 산책 코스가 끝나간다.
화장실. 파우더 룸에 고객용으로 마련된 소파에 다소 피곤한 듯 엘라와 좁은방과 엘라의 쇼핑백들이 앉는다. 엘라는 핸드백에서 파우더 케이스를 꺼내 거울을 들여다본다. 좁은방은 담배를 꺼내 문다.
--- p. 129
이제 더 이상 모팅콜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어요. 그리고 당신이 일러준 수면제를 사먹고 며칠 만에 깊은 잠을 잤죠. 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걸 알아챈 당신에게 계속 팩스 서비스를 받고 싶군요. 전처럼 매일이 아니어도 좋아요. 물론 이젠 어떤 내용이든 상관없구요. 난 더 이상 광고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아니니까요. 뭐든 당신 마음대로 적어 보내줘요. 왜냐구요? 그런 것들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우린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군요. 이 정도가 좋겠죠. 어쨌든 난 팩스를 계속 받고 싶어요. 내용은 당신이 선택해요. 잘덴이란 수면제의 종이갑에 적힌 글자를 모두 적어보냈던 것처럼. 변한 건 없어요. 난 변하지 않은 요금을 송금할 거구요. 팩스 기다릴게요.
--- p.201
늙은 의사의 늙은 모가지가 붉게 부풀어올랐다. 나타샤는 무력하게 내둘린다. 늙은 의사가 나타샤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쥔다. 머리를 벽에 짓찧는다. 여자의 사진을 담은 액자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나타샤는 젼디기로 한다. 늙은 의사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두터운 베개가 나타샤의 얼굴을 덮는다. 할아버지의 호밀밭을 생각하면 숨이 차올랐다.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뛰었다. 여전히 익숙한 조선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늙은 의사가 힘껏 베개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오른쪽 심장이 연약한 새알처럼 와직 깨어져버릴 것만 같다. 낯선 길을 갈 때는 발 밑을 조심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발걸음은 무언가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여 그 돌이킬 수 없음을 기대하며 함부로 숨찬 발걸음을 내디뎠던 것은 아닐지.
--- p. 117
나는 나의 그녀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십여 년을 연예인으로 살아왔다. 속된 말로 연예계에서 잔뼈가 굵은 것이다.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에서 왕관을 차지하고부터는 '보옽'으로 살아 갈 수 없게 된 그녀. 그러나 뜻밖에도 그만큼이나 서툴고 허술한 그녀. 더구나 엄마 없이.

G의 표정에서 어딘지 모르게 교활한 계략의 냄새가 풍긴다. 옛정이나 의리는 허울뿐인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그녀를 지켜봐온 G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고 있는 G다. 최근 그녀의 처지 역시. G는 지금 그녀의 조바심과 초조함을 완벽하게 간파하고 있다. 그녀를 훑어내리는 간교한 시선. 아직 쓸 만한가, 하는 눈빛이다.
--- p. 29
그녀는 그의 가방을 열고 길쭉하게 접힌 스포츠 일간지를 꺼낸다. 만나자마자 그가 그녀에게 펼쳐 보인 맨 뒷면의 전면광고 - 1003년 4월 1일 쇼핑의 지상낙원을 만난다. "Buy-Buy Paradise"오픈 기념 사상 최대 경품 대축제.
낙원을 파는 쇼핑센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대리석 야자수들이다. 한 그루가 족히 십 미터는 될 것 같은 대형 야자수 조각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흰 대리석 표면에 작은 금빛 전구가 크리스마스 트리에서처럼 친친 감겨 빛나고 있다. 낙원을 파는 쇼핑센터.
--- p.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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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조의 소설들은 한 마리 고양이가 쓴 것이다. 콘크리트의 숲에서 살아가는, 이 작고 예민한 짐승은 부드러운 앞발 속에 날카로운 발톱을 감춘 채 도시의 어딘가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짐승의 움직임은 차분하고 때로 민첩하지만 대체로 게으르다. 이 교활한 게으름이야말로 고양이만의 것이다. 그렇게 권태를 가장한 채 세상을 어슬렁거리는 이 고양이에게서 '습격자의 눈동자'를 발견하는 이들은 드물다. 그 '습격자의 눈동자'에 비친 도시는 풍요로우나 가혹하며 익명 속에서 불우하며 무심한 살의로 가득한 곳이다. 그런 세상에서 한 마리 고양이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아한 발걸음과 은폐된 적의를 보존하면서도 누구와도 깊고 내밀한 지경을 형성하지 않을 그런 고양이로? 이신조의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그런 것이다. 공동체를 보존하고 세상을 건설하고 소외를 지양하는 일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믿는 소설, 그것은 분명 고양이의 것이다.
--― 김영하(소설가)
모든 것이 전도된 세계, 이신조의 소설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이렇게 문맥화한다. 하여, 이신조의 소설에서는 비디오방, 놀이공원, 호텔 등 인공낙원의 화려함이 인간의 고독, 권태, 도구화를 가져오는 실낙원의 징후로 읽히고, 인간 존재들의 숨가쁜 활동들이 모더니티가 만들어놓은 견고한 이미지들에 의해 조장된 목적 없는 모험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신조의 소설은 모든 욕망과 쾌락이 거짓인 이 황무지 속에서도 어떤 의미 있는 가치를 길어올리고자 한다. 그것은 타락한 세계로 편입되기 이전의 어떤 상태나 기억일 경우도 있고 또한 미친 모더니티가 우리 삶 속에서 지워버린 본질, 차이 등일 때도 있다. 어떤 경우든 이신조의 소설은 자본주의적 확실성에 의해 폐기된 불확실한 가치들에 끈질긴 시선을 보내고 있으며, 이 시선은 주체성 없는 주체들의 삶이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밀도 있게 만들어낸 핵심적인 계기이다.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예에게서 확실성 너머의 또다른 가치를 찾으려는 열정과 그 열정을 과장하지 않는 냉정함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경이롭다.
--- 류보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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