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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제국

[ 양장 ]
리뷰 총점8.8 리뷰 4건 | 판매지수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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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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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6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510쪽 | 1694g | 188*254*35mm
ISBN13 9788937425691
ISBN10 8937425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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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건설: 해적 집단으로 출발한 영국은 어떻게 전 세계 4분의 1을 지배했는가?
영제국은 본래 경제적 현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런 현상의 성장은 상업과 소비자 중심주의를 촉진했다. 상인들은 설탕을 얻기 위해 카리브 해로, 향신료, 차, 직물을 얻기 위해 아시아로 몰려갔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전함의 세계화였다.
사실 영국은 최초의 제국 건설자는 아니었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영국은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 제국이 흘린 부스러기를 찾아다니는 해적, 즉 제국의 모방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파냐 인들을 강탈하고, 네덜란드 인들을 모방하고, 프랑스 인들에게 타격을 가하며, 인도 인들을 약탈하였고, 그 결과 200년 후에는 5대륙 43곳의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고 지구의 4분의 1을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영국적 세계화: 전 세계를 하얗게 물들이다
영국적 세계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민족을 이동시킨 이주의 역할이다. 영국의 식민화는 종교의 자유나 정치의 자유 또는 이윤을 얻기 위한 거대한 민족적 이동을 충동질했다. 17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300여 년 동안에 2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영국 섬을 떠나 전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백색 역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영국인들은 전 세계로 이주해 나갔다.
또한 영국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에서 복음주의 종파와 선교 단체들의 역할이 중요성을 띄기 시작했다. 이때 아프리카에서는 선교 운동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빅토리아 시대의 초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이다. 잠비아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있고, 현재 인구가 겨우 9만 명에 불과한 리빙스턴에 교회 수가 150개나 되는 것에서 아프리카의 복음화된 정도를 알 수 있다.

세계 정부를 자처한 영국: 불과 1000여 명으로 어떻게 4억 인구를 통치했는가?
영제국은 세계 정부를 자처했다. 그러나 그 운영 방식은 최소주의에 근간을 두었다. 영국령 인도에 대한 통계 수치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인도 공무원의 숫자이다. 1858년에서 1947년 사이에 서약직 공무원은 거의 1000명이 넘지 않았는데, 영국 통치 말기에 총 인구는 4억 명이 넘었다. 영국의 지배자들과 신구 토착 엘리트들 사이의 공생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지속될 수 없는 공생관계를 생생히 파헤친다.
아울러 이 무렵 세계적인 채권 시장과 군산 복합체, 대중 매체가 출현했고, 금융의 세계화가 이루어졌으며 유럽 열강 사이에서는 치열하게 군비 경쟁이 펼쳐졌다. 당시 영국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극동에서도 쟁탈전의 선두에 서 있었다. 피지, 쿡 제도, 뉴헤브리디스 제도, 피닉스 제도, 길버트 제도와 엘리스 제도, 솔로몬 섬, 보르네오 북부, 말라야, 뉴기니 등을 지배 아래 두고 계속 지배 면적을 넓혀 나갔다. 『세인트 제임스 가제트』에 따르면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은 “하나의 대륙, 100개의 반도, 500개의 곶, 1000개의 호수, 2000개의 강, 1만 개의 섬”을 지배했다.

20세기 영제국: 오늘날 우리에게 영제국은 무엇을 남겼나?
영제국이 민족주의뿐만이 아니라 훨씬 무자비하고 경쟁적인 제국에 의해 도전받고 있음을 설명한다. 영제국은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입장이 바뀌었으며, 번성기 때 민족 이동은 역이동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두 차례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영제국은 중첩된 부담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좋든 싫든 영제국은 인류에게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먼저 영어의 국제화를 들 수 있다. 지난 300년 동안 단일 수출 목록으로는 최고다. 덕분에 지구상에는 7명에 1명이 영어를 구사하고 있다.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랄라시아의 영국화, 의회 민주주의의 확대, 경제 체계로서의 자본주의 승리,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 자유 무역의 확대 등이 그것이다. 반면 영국의 세계 지배는 식민주의를 낳았으며, 인종주의, 인종 차별, 외국인 혐오증 등의 뿌리 깊은 갈등을 야기시켰으며, 부인할 수 없는 노예제와 노예무역, 수단의 사막을 붉게 물들인 옴두르만에서의 과잉 살상, 암리차르 대량 학살 등 영제국의 어두운 면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는 이슬람 수도사의 지도자 마흐디를 빅토리아 시대의 오사마 빈 라덴, 다시 말해 변절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라 언급하고, 혁명가 고든의 살해는 9?11 테러의 축소판이라고 비교한다. 또한 옴두르만 전투는 미국이 이라크나 탈리반 정권에 대해 치르고 있는 전투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회원리뷰 (4건) 리뷰 총점8.8

혜택 및 유의사항?
나의 무지를 일깨워주네요!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YES마니아 : 로얄 혜***맘 | 2006.12.31 | 추천3 | 댓글1 리뷰제목
이 책은 영국이 17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식민지 경제를 형성하는 과정과 그와 경쟁했던 이웃 열강들의 제국에 대한 위협, 2차 세계대전 후 제국의 붕괴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운 Non-Fiction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세상살기가 점점 힘들어져 가서 그런지 책도 경제 경영 자기계발 분야의 재테크관련 서적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현대의 경제적 상황에 맞는;
리뷰제목
이 책은 영국이 17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식민지 경제를 형성하는 과정과 그와 경쟁했던 이웃 열강들의 제국에 대한 위협, 2차 세계대전 후 제국의 붕괴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운 Non-Fiction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세상살기가 점점 힘들어져 가서 그런지 책도 경제 경영 자기계발 분야의 재테크관련 서적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현대의 경제적 상황에 맞는 재테크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역사적으로 부가 형성되는 과정과 배경을 이해하고, 그것을 현재의 경제활동에 초석으로 삼는다면,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현재 인류가 누리는 다양한 정치제도 경제제도 등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면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그 모든 것들이 처음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제적 측면에서 암흑기였던 중세시대 이후 영국에서 부가 형성되는 원리와 인류가 부를 형성해 나가는 형태와 과정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당시 주위 나라들과의 어떤 ‘차이’를 보였고, 그 ‘차이’가 어떻게 4백 여년 동안 세계 제국으로서의 위용을 떨칠 수 있었는지 먼저 알 필요가 있다. 무엇이 성장을 낳았을까? 그것은 첫째, 재산권의 제도적인 정착에 있다. 물론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제한적인 재산권의 보장은 있었지만, 모든 권력과 권한이 강력한 전제군주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 서민이 갖는 소유권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통법이 영국에서 먼저 나타났으며, 당시 영국의 군주 또한 영향력이 크게 감소되어 있었고, 명예혁명을 계기로 재산권을 바탕으로 한 네덜란드의 선진금융시스템이 들어와 제국으로서의 경제적인 발전의 근본이 마련되었다. 둘째, 과학적 합리주의의 발현이다. 그 시대(17세기) 이전 1000년 동안 교황 중심의 기독교적 신념에서 파생된 프톨레마이오스/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방식이 지배해 왔었다. 그것들은 종교적 신념체계로 과학적 진보의 가능성을 가로막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영국이 낳은 천재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제 1의 원리(결코 의문시되지 않으며 참인 것으로 가정되며, 추론에 기초가 되는 사고방식, 이른바 연역적 사고방법, ex, 천동설)에 대항하여 귀납적 사고방식(선입견 없는 사실, 현상, 관찰의 결과로 얻은 지식을 통해서 분석되는 과학적 체계)을 체계적으로 전파하였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개선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방식에서 끊임없는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와 ‘의심’을 통한 실질적인 과학적 진보(귀납적 사고의 확립)을 가능케 했다. 또 그는 자연세계에 대한 지식은 지속적으로 증가 될 수 있고, 더불어 인류의 복지도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셋째, 자본이다. 자본은 돈의 가치에 해당하는 ‘이자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왕당파를 물리치고 네덜란드에서 선진금융기법과 낮은 이자율로 대표되는 네덜란드 자본이 유입되었다. 이 자본을 바탕으로 이른바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넷째, 수송과 통신수단의 발달이다. 이것은 명예혁명(1688) 훨씬 이후의 일이지만 영국이 세계무대에 우뚝 나설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자본’의 바탕을 통해서 나온 과학적 기술의 결과(증기기관차)가 큰 기여를 함으로써 생산성이 증가했으며, 전기신호의 발견에 대한 파급효과는 초기에는 미미했지만 Victoria 시대 전성기에는 대륙횡단 전선(해저케이블)이 깔림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영국은 17세기 중반까지는 재정적으로 몹시 불안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군주들은 오랜 전쟁으로 경제적으로 부채가 많은 상태였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특정 이익집단에 독점권을 남발했다. 그것은 설상가상으로 더욱더 영국 경제를 황폐화 시켰다. 정치적 측면으로는, 국외에서 그 당시 세계최고의 부를 누리고 있던 이웃나라 네덜란드와 100년이 넘는 긴 전쟁을 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1688년 명예혁명이 있기 전까지 의회파와 왕당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정치적 경제적인 어려움들을 명예혁명 이후 네덜란드의 선진금융 제도를 받아들이고,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이런 국내외에 처해 있던 어려움들은 서서히 극복되어 갔다. 이때 식민지 지배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18세기 중엽 영국은 막강해진 해군력으로 7년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진정한 세계 제국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반면에 프랑스와의 잦은 충돌로 그 당시 식민지 아메리카에서의 독립운동 기운을 제 대에 억누르지 못했으며, 이것은 영제국이 해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 이기도 하다. 영국이 당시 제국주의 국가로서 식민지를 형성할 때에는 그 목적이 다분히 식민지 경제 수탈 또는 국내문제 해결 방편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다져져 있는 영국의 정치 경제적 시스템으로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출발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1900년대 초반까지 영국은 인도 아프리카 등에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챙겼으며, 그 이익은 영국군이 가지고 있던 총과 칼, 국내 소수 엘리트 자본가(로스차일드 가문)에 의해 더욱더 가속화 되었다. 그러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영도아래 조용히 세력이 커져갔던 독일은 실제적으로 영국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었다. 실제 영국은 1차 세계대전(1914 – 1918)과 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전쟁에 대한 엄청난 경제적 부담으로 결국은 신흥강대국 미국에게 세계의 주도권을 내주었다. 동시에 영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에서도 독립하는 사례가 빈번해졌으며, 400여 년 동안의 식민지 지배를 통한 경제적 이익을 취해 왔던 영국으로서는 재정적으로 파산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서기 3세기에 로마로 들어오던 전리품의 흐름이 끊기자 국내의 퇴화된 부문(농 상업)에서 그 재정을 메울 수 없어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과 유사하다. 영국이 당시 세계에 미친 정치적 경제적 영향은 결과적으로 엄청났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를 통해서 피지배자를 수탈하고 노예화했으며, 이단자들로 치부하여 수많은 생명을 비인도적으로 앗아갔지만, 오늘날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선두에 있는 나라들(미국, 호주, 뉴질랜드, 서유럽 대부분 국가들)에게 부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토대를 심어줬고, 세계제일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오늘날의 영어 또한 옛 영제국의 식민지 유산의 대표적인 산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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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J*******t | 2021.12.10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주요 저서 가운데 한 권으로 꼽히는 이 책 '제국'은 유럽 변방 섬나라인 영국이 어떻게 세계 전 대륙에 진출한 대영제국이 될 수 있었는지 다루는 책이다. 식민지배, 수탈 등 제국주의의 부정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다른 저서와는 다르게 제국주의의 긍정적인 측면, 국가 발전의 요소들을 찾아내 소개한 점이 특징이다. 저자의 이 같은 시각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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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주요 저서 가운데 한 권으로 꼽히는 이 책 '제국'은 유럽 변방 섬나라인 영국이 어떻게 세계 전 대륙에 진출한 대영제국이 될 수 있었는지 다루는 책이다.

식민지배, 수탈 등 제국주의의 부정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다른 저서와는 다르게 제국주의의 긍정적인 측면, 국가 발전의 요소들을 찾아내 소개한 점이 특징이다.

저자의 이 같은 시각은 뒤에 나오는 '콜로서스'와 '시빌라이제이션' 등에서도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출간된 지 시간이 이미 흐르긴 했지만 여전히 흥미롭게 읽을 요소들이 가득한 책이다.

다만 도감처럼 큰 판형에 컬러 인쇄용지를 사용해 책의 부피가 매우 두터워졌다는 점은 아쉽다. 그래서 2006년에 출간된 책인데도 가격이 높은 것 같다. 어차피 사진은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는 게 훨씬 선명한 만큼, 시각자료들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들고다닐 수 있는 판형으로 만들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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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 요람에서 무덤까지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2010.09.29 | 추천1 | 댓글1 리뷰제목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데 약 3세기가 걸렸다. 절정기에 대영제국은 세계 지표면의 25%를 차지했고 거의 같은 비율의 인구를 통치했다. 뿔뿔이 흩어진 몇 개의 섬만을 유품으로 남긴 채. 해체하는 데는 단 30년이 걸렸다."이책의 질문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였던 대영제국이 어떻게 300년 동안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런 제국이 어떻게 단 30년만에 해체될 수 있었는가? 이다. 대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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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을 건설하는 데 약 3세기가 걸렸다. 절정기에 대영제국은 세계 지표면의 25%를 차지했고 거의 같은 비율의 인구를 통치했다. 뿔뿔이 흩어진 몇 개의 섬만을 유품으로 남긴 채. 해체하는 데는 단 30년이 걸렸다."

이책의 질문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였던 대영제국이 어떻게 300년 동안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런 제국이 어떻게 단 30년만에 해체될 수 있었는가? 이다.

대영제국의 시작은 모든 영광이 그렇듯이 허접했다. 대항해시대에 이웃나라들의 부와 영광을 구경만 해야 했던 영국은 가난하고 보잘 것없는 섬나라 촌구석일 뿐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을 약탈하고 아시아의 부를 실어나를 때 영국은 스페인의 배를 해적질해 부스러기를 주워담는 수준에 만족해야 햇고 그들이 내버려둔 북미의 허허벌판에서 대구나 잡고 담배나 키우는 것으로 주린 마음를 달래야 햇다.

그러나 스페인 제국은 바로 그 영광의 광채 때문에 오래가지 못한다.

처음부터 스페인은 약탈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나라였다. 레콩퀴스타라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이라는 것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고도의 시스템을 갖춘 이슬람 도시들을 약탈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신을 진심으로 믿었고 기사도의 명예를 믿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들의 약탈을 정당한 것으로 믿고 싶어하는 심리적 방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본토에서 약탈 대상이 사라졌을 때 아메리카 대륙이란 행운이 찾아왔다. 잉카와 마야는 제국으로서 약탈하기 딱 좋은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두 제국이란 희생자의 피도 다 빨린 후에 스페인 제국에게 남은 것은 몰락 밖에 없었다.

단명에 그친 스페인 제국과 달리 대영제국은 장수를 누렸다. 대영제국은 스페인 제국과 달리 정복과 약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건설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의 시작은 아일랜드 정복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일랜드부터 시작된 영국의 식민지는 북미로 확대되었다. 아일랜드부터 북미까지 영국 식민지의 공통점은 스페인과 달리 국내에 넘쳐나는 인구를 수출하는 '백색역병'이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식민지는 말 그대로 '사람을 심은 땅'이었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까지 대영제국의 시스템은 서인도제도에서 설탕을 재배해 영국으로 수출하고 영국은 설탕을 유럽으로 재수출하며 북미 식민지는 서인도제도에 식량을 수출하는 삼각무역이였다.

삼각무역의 꽃은 설탕이엇다. 그러나 그 설탕은 노예의 피를 먹고 피어야 하는 꽃이었다. 노예를 조달하기 위해 영국은 포르투갈이 개척한 노예무역에 뛰어들어 최대의 노예무역국이 된다.

영국의 제국건설은 정복과 약탈에 기초한 스페인과 달리 영토국가의 확장이란 성격을 가졌다. 스페인은 약탈하기 위해 원주민이 필요햇다. 그러나 영국은 자국인을 옮겨 정치, 경제, 문화를 그 땅에 그대로 복제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원주민은 경작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잡초일 뿐이었다.

약탈이 아니라 착실히 영토를 늘려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건설은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렇게 건설되었기 때문에 미국을 제외하고 당시 건설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오래도록 제국에 충실한 식민지로 남을 수 있었고 안정적인 제국의 기초가 만들어질 수 잇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제국의 땅은 만들어질지 모르지만 제국의 영광은 느낄 수 없었다. 당시 제국의 영광이란 광채는 아시아와의 교역에서 나왔다.

그러나 아시아 교역은 포르투갈을 누르고 교역망을 장악한 네델란드의 패권에 도전하는 힘든 작업이엇다. 영국은 네델란드와 전쟁까지 불사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결은 간단햇다. 네델란드가 영국을 인수한 것이다. 오렌지공이 영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네델란드와 영국의 정치/경제는 통합되었다. 국은 인도를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영역권으로 나누게 된다.

아시아에서 영국의 관심은 영토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건설해야 하는 북미와 달리 아시아에는 고도의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었고 영국이 할 일은 그 시스템에 자리를 만드는 일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엿다. 무역권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와 같은 유럽의 경쟁자는 물론 인도 내의 토착권력과 무력경쟁을 벌이다 지배권까지 얻게 된 결과일 뿐이다.

그렇게 얻게 된 식민지의 운영은 북미의 식민지와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은 물론 선임자인 포르투갈, 네델란드의 무역은 기존에 이미 있는 아시아의 무역 네트웤에 참여하는 것이었지 네트웤을 건설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제도와 세력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엇고 그런 관행은 영토를 얻게 되었을 때도 그대로 이어진다. 영국은 기존의 지배층과 협력해 통치하면서 존의 정치/문화를 그대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아시아의 영토를 통치했고 아프리카에서 얻은 영토에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응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날 무렵이 되었을 때 그런 식으로 조금씩 넓어진 영국의 영토는 어느새 사상최대의 제국이 되어 있었고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제국이 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각은 우월감과 자긍심이 된다.

19세기 영국은 노예무역을 금지한다. 당시까지도 노예무역은 여전히 수지맞는 장사였다. 그러나 제국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된 영국은 더 이상 더러운 장사를 하면서 자존심을 더럽히고 싶어하지 않게 되었다.

자부심 넘치는 제국은 자신이 우월한 것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며 사명감을 갖게 된다. 신의 선택을 받은 우월한 자신들은 세계를 이끌 의무가 있다고(백인의 의무) 생각하면서 제국건설의 실제 이익과는 그다지 관계없는 선교에 열을 올리게 되며 뒤떨어진 불쌍한 예속민들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우월의식은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영국의 지배는 스페인이나 네델란드, 프랑스와는 달랐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지금까지도 프랑스혁명의 나라라며 자유,평등,박애의 나라라 떠벌리지만 그들의 식민지에서 그런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프랑스 제국은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영국은 여건이 되는 한 자국에서와 비슷하게 통치하려 노력했고 다른 제국들보다 더 효율적이고 공정하며 부패와 거리가 먼 식민지 행정을 보여주엇다. 적어도 우월감은 책임감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책임감은 미국의 독립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결과이기도 하다.

미국혁명의 구호는 '대표없이 과세없다'였다. 미국의 독립 이전 런던의 중앙정부와 미국 현지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경우가 많았다. 식민지의 의원이 런던의 의회에 참여하고 중앙에서 임명된 총통에 현지인들이 민주적인 견제를 할 수 잇다면 그런 이해관계의 충돌은 완화될 수 있었고 독립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혁명 당시 미국인의 1/3은 영국에 충성하는 왕당파엿고 이들은 영국정부보다 더 열심히 혁명군과 싸웠다.

미국 독립 이후 중앙과 현지의 이해관계 충돌이 완화될 필요가 잇다는 교훈을 얻은 영국은 이후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 등에 미국인들이 요구햇던 자치권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제국의 우월감은 부정적이기도 햇다. 19세기 당시 유럽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선 과학적으로 백인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골상학과 우생학이 유행한다.  영국에서 백인이 앵글로색슨으로 바뀌었을 뿐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터무니 없는 우월감은 제국의 원심력이 된다.

제국의 건설에는 막대한 인력이 필요하다. 그 인력은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족에게서만 나온 것은 아니엇다. 오히려 제국의 군인, 상인, 행정인력의 대부분은 켈트족인 스코틀랜드에서 나왔고 아일랜드에서 나왔다. 당시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영국은 종교적/민족적 관용을 택했고 대영제국은 그 관용의 기초 위에 건설되엇다.

제국의 관용은 백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었다. 1858년 빅토리아 여왕은 "유럽인들과 토착민들 간의 완전한 평등'을 선언했다. 그 선언 이전에도 이후에도 영국은 식민지 지배에 광범위하게 현지인을 채용했다. 영국이 인도에 파견한 영국인은 천단위에 불과했다. 방대한 영토의 통치는 인도에서 채용한 현지인 엘리트들에 의지했고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대에 의존했다. 제국의 통치는 현지 엘리트의 협력없이는  여왕에 대한 그들의 충성없이는 불가능한 과업이었다. 그러나 그 제국의 관용은 불완전했다.

저자는 불완전한 관용의 대표적인 예로 1880년 인도에서 일어난 '백인폭동'을 예로 든다.

당시 인도에서 영국인 치안관과 판사는 영국인과 인도인에 대해 모두 심판권이 있었지만 같은 직위의 인도인은 그렇지 못했다. 같은 시험을 통과했고 같은 여왕이 임명한 동등한 제국의 관리에게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1880년 인도 부왕으로 부임한 리펀은 인종간의 권리차이를 없앤다.

그러나 인도 현지의 영국인들은 이에 반대해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킨다. 그들은 '열등한' 인도인이 '우월한' 백인을 판단할 능력도 권리도 없다며 분노했다. 그리고 그들의 인종적 교만은 인도 엘리트들에게 영국이 자신들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고 이후 국민회의가 조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에이미 추아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이 인도를 상실하게 된 것은 아일랜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용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인도의 경우 영국은 수십년간 피지배민들 내부에 축적되어온 선의를 완전히 날려버리고 말았다. 1차대전 직전까지도 인도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영국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1914년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영제국의 국민이다. 지금 영국 국민으로써 우리가 할 일은최선을 다해 영국을 지원하고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바쳐 싸우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캐나다를 비롯해서 '백인'들이 거주하는 영국의 다른 영토들이 누렷던 것과 같은 자치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황된 꿈이엇다."

그러나 퍼거슨은 다르게 본다. 인도를 잃은 것은, 대영제국이 무너진 것은 제국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 외부의 문제였다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대영제국은 두번의 세계대전 때문에 무너졋다고 말한다.

대영제국의 비용은 그리 높지 않았다. 19세기 말 영국의 군사비는 GDP의 2.8% 수준이엇다. 그러나 영국이 자유무역이란 제국의 기초 위에서 얻은 이익은 GDP의 6.8%였다고 계산한다. 제국은 분명 남는 장사엿다. 그러나 그 비용과 이익이 제국의 누구에게 돌아가는가는 다른 문제엿다.

제국의 비용은 납세자들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제국의 이익은 시티의 은행가들에게 돌아갔다. 납세자들의 돈으로 로스차일드가를 키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국 곳곳으로 떠난 군인, 행정가, 상인, 탐험가 등에게는 영국에서보다 더 나은 수입이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본토인보다 더 낮은 세금을 낼 뿐이었고 대부분의 비용은 본토의 납세자에게서 나왔다. 물론 제국의 손익계산서는 제국의 영광이란 허상으로 가려질 수 있었다. 당시 쏟아지기 시작하던 영화는 제국의 영광을 선전하는 좋은 매체였고 전통적인 신문, 잡지도 그런 허상을 키웠다.그러나 그런 허상은 1차대전이 날려버린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당신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나는 당신의 수류탄과 총검과 무기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당신의 나이와 당신의 얼굴과 우리의 공통점을 생각하고 있다. 용서해주게 전우여. 우리는 언제나 너무 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왜 그들은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어머니가 걱정하고 똑같이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고 똑같이 죽고 고통스러워하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걸까? 용서해주게 전우여. 당신이 어떻게 우리의 적이 될 수 있겠는가?"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이다.

1차대전은 제국의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국민들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폐허만 남았을 때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엇다. 그들이 싸웠던 제국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엇다.

아일랜드의 독립은 바로 그런 자신감의 상실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전간기에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나타나게 될 유형이엇다. 비국교도의 사소한 폭동, 매서운 군사적 대응, 그 다음에 영국의 자신감 와해, 죄책감, 재고, 너절한 양보, 또 한번의 양보가 이어졋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시험 사례엿다. 실로 영국인들은 자신의 첫번째 식민지가 들로 나누어지는 것을 승인하면서 제국 전체에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타는 또 다시 독일로부터 왔다. 홀로 히틀러에 맞서면서 영국은 제국의 모든 자원을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엇다. 미국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미국의 힘은 공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대영제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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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얼 퍼거슨의 독창적인 대영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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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 | 202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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