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학에서 미생물학과 면역학 석사를 마치고,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저널리즘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학협회저널의 특파원을 거쳐 오리건 대학 출판부에서 일했고, 여러 단체와 학교에서 저널리즘과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빚어낸 과학기술과 과학자에 대한 글쓰기를 즐긴다. 지은 책으로 《현미경 속의 악마The Demon Under the Microscope》, 《화학 혁명과 폴링Linus Pauling: And the Chemistry of Life》 등이 있다.
역자 : 홍경탁
카이스트(KAIST)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기업 연구소와 벤처기업에서 일했고, 일하지 않을 때는 주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봤다. 옮긴 책으로는 《블레임 게임(출간 예정)》 등이 있다. 번역에 대한 의문점이나 오역 신고를 받는 사이트(http://mementolibro.tistory. com)를 운영중이다.
과학자 이야기는 대개 이타적인 사람이 더 나은 인류 운명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찬양한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이 이야기에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책을 쓰고 싶었다. 과학적 이타심이 정치와 권력, 돈, 개인적 욕망과 맞닥뜨렸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진짜 과학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 pp.13-14
1909년 3월, 바스프와 계약한 지 1년이 지났을 때 하버는 돌파구를 찾아냈다. (……) 어쨌든 성공적이었다. 하버는 실험실을 뛰쳐나가 위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따라 여러 실험실을 돌아다니며 머리를 들이밀고 외쳤다. “내려와 보세요. 액체 암모니아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한번 보세요!” 따라온 사람들은 냉각된 암모니아가 플라스크에 떨어지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수십 년이 지난 후 이 광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1cm3가량의 암모니아가 나왔습니다. ……멋진 광경이었죠.”1cm3는 티스푼으로 4분의 1 정도다. --- p.122
정부와의 협정이 체결되면서 바스프는 이제 더는 단순한 화학기업이 아니라 방위 산업체가 되었다. 보슈는 이런 현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팀원들도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식량 생산을 위해 열심히 일해 왔는데, 지금은 같은 기술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고 있었다. 보슈는 이에 대해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이런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보슈의 수석 보좌관은 초석 협상 과정에서 보슈가 “더러운 비즈니스”라고 표현했던 것을 기억했다. 거래가 마무리되자 보슈는 “내 인생에서 가장 취하고 싶은 날이다”라고 말했다. --- p.179
하버는 자신의 독가스 시스템을 서둘러 완성했지만 독일군 사령관들은 좀처럼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개념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장교들은 대부분 독가스전이 달갑지 않았다. 한 독일군 사령관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서“세상에 엄청나게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닌지 두렵다”면서 연합군도 이에 대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처럼 사악한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썼다. “이제 전쟁은 기사도정신과는 무관하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사악해진다.” --- pp.202-203
하버는 케임브리지에서 유서를 작성해놓았다. 유골을 달렘에 클라라의 무덤 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 독일의 반유대 정서 때문에 불가능하다면, 마지막 쉴 장소에 대한 결정을 헤르만에게 맡겼다. 분명하게 명시한 것은 클라라와 함께 묻어 달라는 것뿐이었다. 묘비에 쓸 글은 간단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는 전시에나 평화 시에나 조국이 허락하는 한 조국에 봉사했다.” 헤르만은 하버의 유해를 스위스에 묻었다. 1937년이 되자, 마침내 헤르만은 어머니의 유해를 독일에서 가져올 수 있었다. 헤르만은 어머니의 유골을 하버의 유골 옆에 묻었다. 묘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만이, 태어난 날짜와 사망한 날짜와 함께 적혔다. 아버지가 독일에 봉사한 내용을 묘비에 더할 수는 없었다. --- p.308
보슈는 과학과 기술을 하도록 타고난 사람이었다. 결과는 이제 명백하다. 친구이자 동료인 반나치주의자 헤르만 뷔허는 보슈가 우울증에 빠져드는 모습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썼다. “죽기 전 몇 년 동안, 비록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히틀러의 정책을 실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생각에 집착했다.”정확한 표현이었다. 보슈 평생의 사업, 과학적 발견과 공장들, 전 세계를 먹여 살리고 회사의 수익을 올리려는 시도들은 나치를 무장하고 나치의 연료를 공급하는 데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