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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검은 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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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1998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439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2811333
ISBN10 898281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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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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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은 자신의 직업에 관련된 모든 사무를 완벽에 가깝게 처리했지만 개인적인 일들은 엉망이었다. 이를테면 그녀와 영화보기, 전시회 함께 가기 따위의 약속을 했을 때 그것이 단박에 실행되는 일은 드물었다. 그녀는 사무 외의 스케줄은 거의 관리하지 못해 사람들을 실망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무심하다고, 마음이 찬 일중독자이며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어느 정도 옳았다.

인영은 사람들이 먼저 전화해주면 반가워하기는 했지만 결코 먼저 연락하는 법은 없었다. 그녀는 자급자족하는 조그만 섬에서 혼자서 살아가는 가난한 주민과 같았다. 그녀의 에너지는 자신에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그에 상응하거나 약간 못한 보답을 하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될 만큼 빈약했다. 더구나 그런 식으로 형성된 인간관계조차 조금만 더 나아가려 하면 완고한 성벽 같은 그녀의 경계선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성벽 바깥에서 물러서곤 했다.
--- pp.35-36
그 때 이후로 나는 보는 눈뿐 아니라 기록할 수 있는 눈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이백오십 분의 일 초 혹은 백이십오 분의 일 초라는 찰나를 감쪽같이 내 수중으로 훔쳐낼 수 있게 하는 사진기라는 기계에 나는 매혹되었다. 내가 훔치는 것은 피사체뿐만이 아니었다. 그 찰나의 빛과 시간이기도 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짧은 찰나가 영원이 되는 순간, 긴 침묵이 되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게 되는 순간의 매혹에 나는 빠져들었다.

모든 사물들이 새롭게,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되살아오던 쾌감을 기억한다. 뷰파인더를 통해 보는 세상을 나는 사랑했다. 세상은 이전까지의 남루하고 갑갑한 껍질을 벗고 싱싱하게 살아 숨쉬는 육체로 나에게 육박해왔다. 그때마다 나는 기쁨에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위한 기쁨이었을까. 나는 내가 찍기 시작한 사진들이 내 삶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위한 증거였을까.
--- p.78
그에게는 다시 시작할 힘이 없었다. 아니,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가 찍었던 것은 이제 사라져버린 것들이었다. 없는 것을 어떻게 카메라에 담을 것인가.--- p.97

……마치 식물 같았어요. 이렇게 어두운 방에서도 그애는 늘 저 창문을 향해 앉아 있었어요. 어두운 방에 놓인 화분 속의 풀이, 아무리 가냘픈 빛이라도 있으면 그쪽으로 구부러지는 것처럼 말예요.--- p.266

어떤 환부에는 약도 시간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오로지 익숙해지는 것으로만 잊을 수 있는 통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에게 맞는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오히려 나를 지켜주는 것이 그동안 나를 결박해온 어둠이라는 것을 알았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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