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네 다리로 흙바닥을 굳게 딛고 서 있었다. 컴퍼스로 그린 원처럼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룬 듯 안정된 자세였다. 검은 구슬 같은 두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딱 그런 말이 생각났다. 무표정한 얼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표정이었다. ---p.28
저 붉은 스프레이는 도대체 누구 짓일까. 지금까지는 험상궂은 자국이 악당을 더 악당답게 만든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멋진 흉터가 아니라 그냥 끔찍한 흉터일 뿐이다. 스프레이니까 분명 사람의 짓이다. 누군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일부러 악당의 몸에다 붉은 줄을 그어 버린 것이다. 수련회 때 자는 애들 얼굴에 그린 낙서처럼 장난스럽지도 않고, 연예인의 문신처럼 멋지지도 않다. 실수로 그린 것도 아니다. 악의적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악의, 그건 아주 나쁜 뜻이라는 말이다. 누군가 아주아주 나쁜 뜻으로 악당의 옆구리에 칼에 베인 것 같은 자국을 남긴 것이다. ---pp.121~122
웃음은 사람의 인상을 좋게 만드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생 각이 틀렸다. 황 사장 아저씨의 웃는 얼굴은 너무도 잔인해 보였다. 그게 바로 진짜 악당의 얼굴이었다. 악당. 녀석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 준 게 후회스럽다. ---p.123
어딘가 개들을 위한 세상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에서는 개가 주인이 되어 사람을 키울지도 모른다. 그러면 사람은 개들에게 꼼짝 못하고 당하겠지. 나쁜 개를 만나면 길에 버려지고, 나쁜 개가 옆구리에 붉은 스프레이 자국을 남겨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고, 죄 없이 두들겨 맞아도 변명 한 번 못해 보고 안락사당하게 되겠지. 개도 사람도 다 행복한 세상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p.144
내가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계단을 수없이 올라 봐도 그 답을 알 수는 없을 거다. 어쩌면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p.145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여러 친구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다. 서로 다른 얼굴의 친구들이 모여 있는 교실과 같다. 한 사람이 한 자리씩, 그것이 교실의 법칙이다. 이를 테면 까마귀 한 자리, 반달가슴곰 한 자리, 개구리 한 자리, 쉬리 한 자리 그리고 사람도 한 자리. 물론 우리의 ‘악당’에게도 한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