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그의 이야기에 빠져서 듣고 있다가, 문득 이것이 ‘임사체험’ (Near Death Experience)이구나 싶었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위 천국에 다녀왔다고 증언하고 있고, 그것이 책이나 영화로도 다뤄져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선생님께서 겪으신 일이 혹시 그냥 꿈이나 환상은 아닐까요?”
나는 짐짓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목사님, 그것이 꿈이나 환상이라면 제가 마음먹기에 따라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모호한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일은 제가 이렇게 혹은 저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너무나 분명해서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없어요. 그리고 그게 꿈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희미해지고 잊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그 장면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집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선생님, 먼저 이런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 양해하시고 솔직히 대답해 주세요. 만일 지금 누가 선생님의 목에 총을 들이대고, 그때 그냥 꿈속에서 헛것을 본 것 같다고 하면 살려 주겠고, 그것을 진짜 현실로 믿는다고 계속 우기면 죽이겠다고 위협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그것을 현실이라고 하시겠어요?”
그는 변함없이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에겐 지금 목사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이 현실이 진짜인 것처럼 그 현실도 진짜이니까요.”
--- p.20~21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들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유물론적 무신론자들이다. 그들은 영혼의 존재를 부인한다. 또한 사후에도 삶이 지속된다는 믿음은 과학이 발달한 지금 같은 시대에 걸맞지 않은 미신이라고 치부한다. 모든 생물은 죽음으로써 그 존재가 멸절된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 입장이다. 따라서 유물론적 무신론자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 자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강력한 징조들이 포착된 것이다.
당황한 유물론적 무신론자들은 임사체험이란 것도 일종의 특수한 생리 반응 중 하나일 뿐이라고 반격했다. 삶의 최종 단계에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뇌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특이한 환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뇌내 현상설’이다.
뇌내 현상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저산소증 이론’이다. 임사체험 때 느끼는 행복감과 여러 환각적 이미지들은 뇌에 산소가 부족할 때 생기는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의학적으로 볼 때 사람이 목이 졸릴 때나 연탄가스에 중독될 때와 같이 뇌가 저산소 상태에 빠지면 쾌감과 환각이 발생한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 일어나는 환각의 내용은 임사체험자들이 경험하는 명료하고 논리적이며 질서 있는 이미지들과는 전혀 다르다. 저산소증 상태에서는 뇌세포의 대사가 느려지고 기능이 떨어져 의식 수준 자체가 저하되기 때문에 환각의 내용이 혼란스럽고 왜곡되어 있으며 아주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소생한 후에도 그 기능이 퇴행하여 환자의 기억력이나 사고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임사체험자들에게서는 그런 퇴행이 없으며, 앞에서 언급한 사례들에서 보듯이 오히려 정신 활동이 이전보다 활발해지고 인격적으로도 더욱 성숙해지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뇌내 현상설은 ‘뇌내 물질 분비 가설’이다. 죽어 가는 뇌 안에서 엔도르핀이나 도파민 같은 물질이 폭발적으로 분비되면서 뇌신경 세포가 과잉으로 활성화되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엔도르핀을 체외에서 실험적으로 주입해 본 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실험대상자는 엔도르핀을 투여 받은 직후에 잠시 무통 상태와 행복감을 느끼는 듯하다가 이내 잠에 빠져들고 말지, 그런 명료한 이미지나 고차원의 정서를 체험하는 일은 전혀 없다고 한다.
그에 반해 임사체험자의 경우 비록 육체는 활동을 멈추고 있지만 내적 의식은 아주 선명해서 자기 머리가 그만큼 맑은 상태가 된 적이 없었다고 진술할 정도다. 이 이론의 또 한 가지 맹점은 진통 효과와 행복감을 유발하는 엔도르핀이나 도파민 등이 대량으로 분비되는데도 왜 무섭고 불쾌한 체험들도 적잖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각종 뇌내 현상설로 임사체험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날이 갈수록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 p.28~30
굳이 칸트의 ‘실천 이성적 요청’과 같은 철학 용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악이 영원히 선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없으며 그렇게 취급 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의 삶이 종료된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어야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개구리 소년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 천진한 아이들을 짓밟아 없앤 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범인은 앞으로도 잡히지 않은 채 자신의 수명을 채울 가능성이 크다. 설령 지금 잡힌다 해도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법으로는 처벌할 길이 없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자. 아이들도 죽어서 영원히 사라지고, 그들을 죽인 자도 죽어서 또 그렇게 사라진다면, 그래서 억울한 자나 억울하게 만든 자나 모두 똑같이 무(無)로 회귀된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진지하고 선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삶의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마감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진실과 거짓은 밝혀지고 당연히 그에 따른 보응이 시행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삶 이후에도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 p.3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