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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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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12쪽 | 285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72752127
ISBN10 89727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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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안규철
1955년생으로 서울대 미대 조소과 졸업 후『계간 미술』기자를 거쳐 독일 슈투르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세 차례의 개인전을 비롯해 국내외의 여러 전시회에 출품한 바 있으며, 저서로『그림 없는 미술관』『그 남자의 가방』이 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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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덜미에 내리꽂히는 햇살이 느껴진다. 여전히 직각으로 내리꽂히는 납덩이 같은 햇살. 해야, 아마도 네가 나보다 오래 살겠지. 여기 나온 게 철없는 짓일까? 그러나 나는 철부지도 아니고, 까맣게 변하는 태양이 보고 싶다. 새까만 태양이란 게 나로선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저들이 또 무슨 이야기를 꾸며댈까? 지난번처럼 바다 밑에서 키운 젖소 이야기 같은 소리를 할까? 할머니, 해저에서 젖소 키운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어요? 그러면 그 젖소는 뭘 먹고 산단 말이야? 미역? 말세야, 말세.
막대기처럼 꽂히는 지팡이와 질질 끌리는 발을 내려다본다. 땅바닥에서 조금씩 미끄럼을 타고 가는 것 같다. 걷는 거라고 할 순 없어도 앞으로 나아가긴 한다. 따지고 보면 중요한 건 그것 아닌가. 벌써 길모퉁이까지 왔나 잠깐 쉰다. 저기 예전 가게가 있던 곳에 새 가게가 들어섰다. 유모차를 탄 아기가 지나간다. 아이구, 머리숱이 어찌 저리도 많을까. 머리카락이 너무 무성하다 . 요새 아이들은 어떤 병을 앓을까? 나는 다시 걷는다. 바삐 걷는 젊은 여자아이의 맨발과 마주친다. 그리고 저 수많은 담배꽁초들, 거무튀튀한 침 자국 . 나는 숨을 헐떡이며 비척비척 앞으로 간다.
달이 가린다는 저 유명한 태양을 보기 위해 겨우 시간에 맞춰 공원에 도착했다.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자니 탄성이 들려온다. 무슨 일인가 벌어지는 것 같고 점점 어두컴컴해진다. 그런데 늙은 등이 잔뜩 꼬부라져 있으니 머리 위의 너무 높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고 수그리고 있으니 다리 사이에서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비둘기, 사람들의 구두만 보인다. 괴상한 비둘기들 이상한 신발들만 .
---pp.43-45
그리고 일식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냐 말이다. 누가 말해준 적이 있었어? 나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읽지 않고 산다. 신문은 덮고 자는 데 쓴다.
정말 마지막 순간에서야, 주변 사람들이 하늘을 보기 시작한 마지막 순간에서야 알았다. 그제서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치챘던 것이다. 벤치에 누워 오랫동안 잠들었다가 막 깨어난 참이었다. 술 마시면 자게 마련이다. 잠은 자도 점심, 저녁 다 챙겨 먹는다. 사람들이 나를 내쫓을 줄 알았다. 나는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겨 조금 기다려보았다. 그런데 아무도 참견하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서 나는 그제서야 이것이 공짜 구경이고 오늘은 누구나 무료 입장이란 것을 알았다. 한 번이나마 이렇게 초대된 것이 흐뭇했다. 하늘에서 구경거리를 기획하면 이렇듯 덜 쩨쩨하게 군다.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이런 기회를 누구보다도 놓칠 수 없다. 나는 내 벤치에 올라가 동공 깊은 곳에 이 모든 것을 깊게 박아놓으려고 눈을 힘껏 부릅떴다. 그런데 눈을 보호하려면 색안경을 껴야 한다는 걸 내가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도대체 그때서야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하나? 너무 늦은 지금에서야 .
나는 멈췄다. 기분이 아주 언짢았다. 우연히 일식에 관한 이야기를 귀동냥한 적은 있다. 색안경을 써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그 이유도 이해했다. 그래서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몽땅 책임지겠다. 그건 내가 선택한 일이다. 나는 선택할 기회라는 것이 아주 드물었던 사람이다. 세상에는 맨눈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오직 나만이 그렇게 보았던 것이다.
발걸음이 늦춰지고 동전이 짤랑 떨어지고 다시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예전에도 보는 게 그리 시원치 않았는데 지금은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차라리 낫다. 진열장에 비친 내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어떤 종류의 시선도 보이지 않는다. 술병이 튀어올라 내 목을 조르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발을 토해버리는 내 신발도 보이지 않고 나를 한없이 비난하는 내 손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던 모든 것이 이제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마지막 시선, 마지막 이미지만 선택한 것이다. 무한한 빛. 이제 나는 퇴장을 준비한다.
이번 겨울에는 나도 일식할 것이다.
--- pp.207-213
「자, 여기에 일식을 보고 있는 식구를 그려라. 메르세데스 아저씨 아줌마에게 보낼 거니까.」
「일식이 뭔데요?」
「어제 봤어야 하는 건데 못 본 거야.」
「그럼 보지 못한 거잖아요.」
「알아. 그래도 괜찮아. 여기에 커다랗게 시커먼 해를 그리고 그 밑에 사람을 그리면 돼. 동생을 그리는 것도 잊지 말아라.」
「새까만 해라구요? 까만 해란 없어요.」
「있구말구. 일식이 일어나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게 어떻게 생겼어요?」
「넌 그냥 해를 그려. 색칠은 내가 할 테니까.」
그는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아이가 마음에 드는 크레용 색깔을 고르는 동안 그는 상상력이 부족한 아이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30초 만에 대충 완성되었다.
「이게 낙서야 뭐야?」
「일식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있는 게 우리구요.」
「엉망이야. 두 살배기 네 사촌동생도 이것보단 잘 그려. 엽서 한 장을 다 망쳐버렸구나. 꼴좋다 .」
「자, 이제 갈 거죠.」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해 밑에 세 사람만 그려진 것을 보았다. 아이 둘, 여자 하나, 그러면 .
「그런데 난, 난 어디 있니?」
「그릴 자리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고 이 불행한 망각을 보완하려고 직접 크레용을 들었다.
--- pp.55-56
「오줌이 마려운데 .」
「10 ...9 」

그는 고개를 저었다.

「참아야 해요.」
「6 ...5... 4 」
「얼마나?」
「2 ...1 ...」
「얼마나? 」

빅토르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가 떠나기도 전에 「언제 도착해요?」라고 묻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엔진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우주선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굉음을 내며 산처럼 높은 하얀 연기를 꾸역꾸역 내뿜었고 거대한 연기는 주변 100여 미터까지 뒤덮었다. 그리고 연기와 함께, 연기 속에, 연기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노란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우주선도, 관객도, 울타리도, 풀도, 헛간조차 사라졌다. 재만 무진장 쌓여 있었다.
발사가 성공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제 망젱 가족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황소자리쯤에 있을지도. 좀 소박하게 달의 궤도에 있을지도. 혹은 다른 곳에. 하지만 누가 알랴? 재미 삼아 구경 나온 사람들 중에서 뭐라고 증언하거나 심지어 엉덩이가 화끈거렸다고 말할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 태양이 가려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었다. 잿빛으로 변한 햇살이 깔리더니 암흑천지가 되었다. 그리고 서쪽에서 수성이, 동쪽에서 금성이, 그리고 레글루수, 베텔기우스, 시리우스가 차례로 빛났다. 알데바란도.
--- pp.168-169
「자, 여기에 일식을 보고 있는 식구를 그려라. 메르세데스 아저씨 아줌마에게 보낼 거니까.」
「일식이 뭔데요?」
「어제 봤어야 하는 건데 못 본 거야.」
「그럼 보지 못한 거잖아요.」
「알아. 그래도 괜찮아. 여기에 커다랗게 시커먼 해를 그리고 그 밑에 사람을 그리면 돼. 동생을 그리는 것도 잊지 말아라.」
「새까만 해라구요? 까만 해란 없어요.」
「있구말구. 일식이 일어나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게 어떻게 생겼어요?」
「넌 그냥 해를 그려. 색칠은 내가 할 테니까.」
그는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아이가 마음에 드는 크레용 색깔을 고르는 동안 그는 상상력이 부족한 아이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30초 만에 대충 완성되었다.
「이게 낙서야 뭐야?」
「일식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있는 게 우리구요.」
「엉망이야. 두 살배기 네 사촌동생도 이것보단 잘 그려. 엽서 한 장을 다 망쳐버렸구나. 꼴좋다 .」
「자, 이제 갈 거죠.」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해 밑에 세 사람만 그려진 것을 보았다. 아이 둘, 여자 하나, 그러면 .
「그런데 난, 난 어디 있니?」
「그릴 자리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고 이 불행한 망각을 보완하려고 직접 크레용을 들었다.
--- pp.55-56
「오줌이 마려운데 .」
「10 ...9 」

그는 고개를 저었다.

「참아야 해요.」
「6 ...5... 4 」
「얼마나?」
「2 ...1 ...」
「얼마나? 」

빅토르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가 떠나기도 전에 「언제 도착해요?」라고 묻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엔진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우주선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굉음을 내며 산처럼 높은 하얀 연기를 꾸역꾸역 내뿜었고 거대한 연기는 주변 100여 미터까지 뒤덮었다. 그리고 연기와 함께, 연기 속에, 연기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노란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우주선도, 관객도, 울타리도, 풀도, 헛간조차 사라졌다. 재만 무진장 쌓여 있었다.
발사가 성공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제 망젱 가족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황소자리쯤에 있을지도. 좀 소박하게 달의 궤도에 있을지도. 혹은 다른 곳에. 하지만 누가 알랴? 재미 삼아 구경 나온 사람들 중에서 뭐라고 증언하거나 심지어 엉덩이가 화끈거렸다고 말할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날 태양이 가려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었다. 잿빛으로 변한 햇살이 깔리더니 암흑천지가 되었다. 그리고 서쪽에서 수성이, 동쪽에서 금성이, 그리고 레글루수, 베텔기우스, 시리우스가 차례로 빛났다. 알데바란도.
--- p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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