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erere Nobis!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비단 눈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이야말로 그 사람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창이다. 하느님이 사람의 얼굴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창조한 것에는 깊은 뜻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우선 얼굴은 두부의 앞면에 존재하며 뒤를 볼 수가 없다. 이는 하느님의 오묘한 뜻으로 너무 사방으로 잘 보아서 산만해지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는 격려의 뜻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눈, 코, 입 등이 모두 적재적소에 있어서 외형적으로도 균형을 이룰 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신기한 것은 두상과 눈, 코, 입, 귀라는 극히 제한적인 요소를 이용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른 생김새를 가지도록 창조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얼굴의 조형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만일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 때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들지 않고 마치 주물을 떠내듯이 대량생산하였더라면 인간 세상에는 큰 혼란이 왔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얼굴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 얼굴 조형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자기가 유일한 존재임을 의미하며 특별한 존재가치를 부여받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창조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얼굴의 표정을 지배하는 것은 선으로, 안면에 있는 온갖 근육의 선이 그 사람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직선으로 다물어진 입은 남성적이며 의지가 강한 인상을 주고 곡선적인 선이 많은 얼굴은 온유하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즉 사람의 성격과 감정을 나타내는 얼굴의 표정을 좌우하는 것이 바로 선인 것이다.
얼굴의 선에 의해 나타나는 인간의 감정은 크게 희로애락喜怒哀樂 네 가지로 나뉜다. 여기에서 인간의 여러 감정을 그림에서 찾아보면 우선 후라고날의 그림 <그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우리는 인간의 즐거운 감정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나타난 예수의 표정에서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애절하고 슬픈 감정으로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에서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앉히고 하염없이 슬픔에 잠겨 있는 성모의 표정을 들 수가 있다. 그리고 부뤼겔의 그림에 등장하여 잔치를 즐기고 있는 농민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에서는 우리는 인간의 즐거운 감정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감정의 희로애락을 나타내는 것이 얼굴인 만큼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외부로 노출시키는 문이다. 그 문을 통해서 사람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감성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볼 때 조광호의 얼굴 그림은 몇 가지 특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첫번째 특징은 그들 얼굴은 하나같이 구원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크게는 피조물로서의 창조자를 향한 절대적 믿음이며 작게는 화가이자 성직자인 조광호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써 제목에서 표현한 것과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애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조광호가 그린 그림의 얼굴은 절망의 계곡에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구원의 소리를 높이는 그러한 진지한 인간의 표정이 담겨 있다.
두 번째 특징은 그 얼굴에는 국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조광호가 얼굴 그림에서 추구하는 것이 보편타당한 미의 원형으로서 어느 한 시대, 한 지역 사람들의 얼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신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크게 서양인과 동양인 또는 백인, 흑인, 황인으로 나뉜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준하여 원시인, 고대인, 중세인, 근대인, 현대인 등으로 나눌 수도 있다. 이러한 구분은 사람 개인의 다양함은 차치하고 오직 시간적인 차이, 공간적인 차이 혹은 외향의 대표적 차이에 근거하여 분류한 것인데 복잡한 인간세상에서 조광호가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구분이 없는 보편타당한 미美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시대, 모든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인간얼굴의 원형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조광호의 그림에 나타난 얼굴의 표정들은 그의 마음의 반영인 것이다.
조광호는 이러한 얼굴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였는데 하나는 흑백의 강한 콘트라스트로 존재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미적 감정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러하지만 얼굴 그림에서도 그는 강직하며 속도의 변화를 머금고 있는 거침없는 필법으로 웅장하고 강렬한 표현을 유발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도 그렇고 그가 편집을 맡고 있는 가톨릭 월간지 《들숨날숨》에서 자주 감상할 수 있는 그의 삽화에서, 혹은 그의 달력그림에서도 그가 그린 얼굴들은 한결같이 희로애락의 감정 동요를 극적인 순간에 포착하여 표현하고 있다. 가령 노인의 얼굴 그림의 경우에는 그 노인을 통해 세상에게 항의하는 그런 항변적인 의미가 크고 여인의 얼굴에서는 죄많은 세상에서 연민하는 성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어떠한 얼굴을 그리는 경우에라도 그 얼굴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인생이 그림의 배경이 된다. 다시 말해서 성직자의 눈으로 본 모든 인간들의 생활감정이 거기에 스며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대변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Miserere Nobis!"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쪹
결국 루오의 판화작품에 나타난 Miserere가 루오가 창조한 얼굴이라면 조광호가 그린 Miserere는 그가 창조한 예술이자 그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20세기 최대의 종교화가 루오가 《미세레레》(Miserere="불쌍히 여기소서", 시편 51의 첫마디)라는 명제로 착수한 58매의 판화집으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원래 미세레레 노비스(라:miserere nobis)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으로 미사가 시작될 때 '자비를 구하는 노래'로 사용된다.
--- 이경성(미술평론가)
조광호 신부님을 보면 나는 늘 어부였던 베드로를 생각한다. 예수를 만나자 그 즉시 그물을 버리고 따라나섰던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사탄이라고 스승으로부터 욕을 먹고, 옷을 두르고 물속에 뛰어드는 성급한 마음으로 마침내 세 번이나 예수를 배신한다. 그러나 끝내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고 원하지 않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조광호 신부님은 그런 어부로서의 열정과 베드로적인 순교정신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광호 신부님은 사람을 낚는 화가이며, 엄동의 그믐밤에도 찬연하게 빛나는 이름모를 별이자 여전히 사랑을 통곡하는 시인이다.
--- 최인호 (소설가)
신부님이 그린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 본다. 여러 사람의 얼굴인 동시에 한 사람의 여러 표정인 것 같은 얼굴들을 들여다 본다. 고통과 증오와 분열과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내비치는 얼굴들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모두 나의 얼굴 같기도 하고 내 어릴적 같기도 하고 내가 보았던 누군가의 표정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제이면서 예술가의 눈을 동시에 지닌 조신부님의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묵상이다. 어느틈에 읽어지는 시와 산문은 아름다운 고백이며 강론이다. 가끔 꽁트로 써먹고 싶도록 짧고 상큼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것도 평소 어렵게만 느껴지던 신부님에게 따뜻한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반가운 선물이다.
--- 박완서 (소설가)
"이제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진정한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줄도 모르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동시대 사람들을 잘 바라보지도 않게 되었다. 오로지 그들에게서 우리의 처신에 필요한 방향과 규칙만을 찾는 데 급급한 탓이다."라고 카뮈는 말했다. 사람의 몸 중에서 항상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고 가장 상처받기 쉬운 얼굴,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가장 잘 비추는 거울인 그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조광호 신부가 붓과 펜으로 그린 사제, 음악가, 시인, 상인, 노동자, 가난한 사람, 이웃 아낙네, 친구들의 얼굴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흠뻑 배어 있는 공감과 연민,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한 사랑 때문이다. 그의 붓은 그리하여 신기료장사의 얼굴이 문득 삶의 진면목으로 승격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 김화영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