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브닌나 없는 한나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한나에게 브닌나가 없었다면. 한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던 여인이었다. 만약 브닌나가 없었다면, 한나는 밀어를 속삭이며 행복에 겨운 시간을 보내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 옆에는 격동케 하는 브닌나가 존재했다. 그 때문에 한나는 기도의 여인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나에게 브닌나는 축복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라. 대개 브닌나 같은 사람이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브닌나는 나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를 성공시키는 자이다. 브닌나 없이 한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이 나를 성공시키는 사람이다.
--- p.84
왜 하나님은 이렇게 우상숭배를 미워하시는 것일까? '관계신앙'의 반대가 '우상신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송아지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섬길 필요가 없어진다. 송아지 우상은 관계불능이다.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맺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송아지 우상의 특징이 무엇인가? 섬김과 교제가 필요 없고, 다만 내게 기계적으로 복만 주면 된다. 송아지 우상은 내 삶에 간섭도 하지 않고, 나의 변화를 기대하지도 않고, 오직 내게 일방적으로 복만 주고, 지켜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상은 무서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복신앙은 우상이다. 왜 그런가? 100퍼센트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은 하나님과의 교제나 관계는 안중에도 없다. 오직 나에게 복 주고, 건강 주고, 길만 열어주면 그만이다. 송아지 우상인 것이다. 말씀에 근거한 진정한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제일 먼저 나 자신을 변화시킨다. 하나님과 좀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변화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기도로 변화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특징은 '수용성'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중심적인 신앙 세계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수용적인 존재로 변화된다. 종종 지나친 자기성찰을 신앙의 본질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항상 '나는 왜 더 잘할 수 없을까', '나는 너무 부족해'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친다. 그러나 변화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단순한 순종이 누적되다 보면,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신다. 양(羊)은 생각이 없다. 목자가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목자가 먹으라면 먹는다. 양이 하는 일이란 그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뿐이다. 신앙의 성장이 빠른 사람들을 보면 특징이 있다.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은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날그날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이다. 깊은 사색이 없어 보이지만 성장은 빠르다. 왜 그런가? 그만큼 수용성이 크기 때문이다.
--- pp.56~57
성경에는 기도의 사람이 여러 명 등장한다. 그러나 삶 전체를 특징짓는 기도를 올린 한 사람을 들라면, 나는 곧바로 히스기야를 연상하게 된다. 히스기야는 나라의 존망 위기에 생명을 걸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끌어낸 사람이다. 또한 면벽기도로 죽을 병에서 생명을 연장받은 기도의 용장이었다. 전자의 기도가 공동체를 위한 지도자의 기도였다면, 후자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개인의 난제를 해결하고 응답을 얻어낸 개인기도의 전형이다. 나는 히스기야의 기도에서 공동체를 위한 기도와 개인을 살리는 기도를 동시에 발견하게 되었다.
히스기야는 국가의 위기를 당해 홀로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한 사람의 기도에 머물지 않았다. 옆으로 점점 퍼져나가는 기도의 불길이 된 것이다. 대신들이 함께 부르짖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만드는 확신에 찬 기도였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개인기도'와 '합심기도'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히스기야는 기도의 용장이었다. 그러나 그도 다윗이나 모세처럼 연약함을 지닌 인간이었다. 성경은 히스기야가 기도로 승리한 사람이었지만 기도한 후에 저지른 그의 실수와 허물까지 솔직히 보여준다. 히스기야의 실수와 연약함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에 관한 더욱 풍성한 지식을 얻는다. 히스기야의 실패는 우리에게 타산지석의 지혜를 준다. 히스기야는 승리 이후 바벨론 사신에게 유다의 모든 보화를 보여주고 자랑하는 교만함을 보인다. 그로 인해 장차 유다는 바벨론에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나라까지 잃는다. 기도한 이후의 교만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예증이자 기도한 다음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준다.
--- pp 33~34
사회가 진실을 잃은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가 능력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가 '슬로건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동하려고 하지 않고 구호만 외친다.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이다. 북한을 보라. 밤낮 구호요, 붉은 글씨의 외침 뿐이다."수령이 가라면 우리는 간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무엇무엇 만세, 무엇은 영원하리" 매사 이런 식이다. 멋진 슬로건이 판을 친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다 엉터리요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슬로건이 대변되는 사회의 약점이다. (...)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보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온다. 공식석상에서 율법사가 예수게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되물었다.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었느냐? 그리고 너는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가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이 무엇인가?
"네 말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사는 이 모든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행함이 없었다. 예수님이 선명하게 보여주는 정답이 무엇인가? "행하라. 그러면 산다"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도 예수님은 물으신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보다 더 강하고, 명확한 메시지가 어디 있겠는가! 세상은 실천하는 자의 것이다. 기도도 예외가 아니다. 기도에 관한 책을 읽고, 기도의 특성과 종류를 나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기도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말의 성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실천에 있다. 기도도 처음에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입술을 열어 작은 기도부터 시작한다면 기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런가? 작은 기도가 또 다른 기도의 능력을 부어주기 때문이다.
--- pp 37~39
그러면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충만이라는 방법이다. 충만이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충만한 수학의 개념과 비슷하다. 즉, 극대점, 극소점과 같은 극점의 개념이다. 속사람이 충만해지면, 겉사람은 깨진다. 그러면 흘러넘친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이 충만함을 살아야 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이 세상에 진공은 없다. 무엇인가 채워야 한다. 충만함으로 살라. 차서 흘러넘치면 전체가 변화되도록 되어 있다.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우유 뷔페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 오랜 기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나오는데, 술집 앞에서 다시 유혹의 물결이 밀려왔다. 그러자 그는 그 길로 2달러 50센트 하는 우유 뷔페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마음껏 마셨다. 정말 양껏 충만하게 먹었다. 건드리면 실수할 만큼 많이 마셨다! 그랬더니 술 생각이 싹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유혹을 이기는 법은 채우는 것이다.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이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시 119:9)
우리가 말씀으로 채워질 때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에스겔서 47장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환상을 보라. 흘러넘쳐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죽은 물을 소성케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장법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다. 그 방법은 충만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언제까지 충만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그리스도인은 한번만 충만하면 되는가? 아니다. 반복해서 수차례 충만하여 깨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콜라병의 충만과 드럼통의 충만과 강물의 충만과 바닷물의 충만은 다르다. 패트병은 조금만 채워도 흘러넘친다. 이것이 패트병의 충만이다. 물탱크가 가득 차려면 이보다는 많이 채워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각 단계마다 충만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흘러넘치고 깨진다. 그것이 바로 성장이다. 처음의 충만은 패트병이다. 금방 충만해지고 깨진다. 그리고 물탱크만큼 성장한다. 가득 채워지면 물탱크도 깨진다. 그래서 저수지만큼 성장한다.
--- pp.111~113
2001년 10월 1일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 ‘이상한 전쟁’(Asymmetric Warfare)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이 칼럼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 붕괴 참사 이후 미국이 좀더 낮아지고 겸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적고 있다. 강한 힘과 앞선 기술을 내세우는 하이테크(high-tech)가 힘과 기술에서 뒤진 로우테크(low-tech)를 언제나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나이프 하나로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졌다고 하면 어느 누가 믿겠는가? 모두들 그 말을 웃어넘길 것이다. 그러나 나이프 하나로 승무원을 위협하고 그 승무원을 이용하여 조종실을 장악한 다음 비행기가 잇따라 건물과 충돌하도록 하자 결국 그 건물은 무너졌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부분에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