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숭배하는 심리야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서나 있어온 것이겠지만 중국사람들만큼 영웅만들기를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어 보인다. 자신들을 <염황(炎黃)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이야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치더라도,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關羽)의 사당이 전국 각지에 세워져 있고 그를 숭배하는 신앙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거나 혹은 민간전설에 나오는 맹강녀(孟姜女), 전설 속의 치수(治水) 영웅 이랑신(二郞神)을 숭배하는 사당 역시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보게되면 그들의 영웅만들기가 그리 심상한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사기(史記)』의 <유협열전(遊俠列傳)>이나 <자객열전(刺客列傳)>, 『삼국지』와 『수호지』에 등장하는 영웅들에 열광하던 중국인들의 영웅숭배 성향은 현대에 이르러 더욱 확실히 드러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오쩌뚱(毛澤東)의 경우이다. 물론 그가 중국의 위대한 영웅 중 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문화혁명의 암흑기를 만들어놓았던 그가 이미 중국에서 신격화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들다. 그의 사진을 부적으로 삼아 택시에 걸고 다니며 그의 사진이 안전운행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는 그들의 믿음은 박정희 기념관 만드는 것조차 못마땅해하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기이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홍콩 느와르라는 명칭까지 만들어내었던 오우삼(吳宇森)의 <영웅본색(英雄本色)>은 또 어떠한가. 중국인 모두를 열광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영웅본색>의 주인공 샤오마(小馬), 의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 속으로 걸어들어갔던 주인공 샤오마는 『사기』에 등장하는 비장한 자객들과 협객들, 그리고 비극적으로 죽어간 실패한 영웅 항우(項羽)의 또다른 버전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중국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후대의 소설과 역사서 속에 형태만 달리하여 나타날 뿐, 그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후대 영웅고사들의 저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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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의 오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딜 가나 문화의 거대한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길을 걸어도, 전철을 타도, 물건 하나를 사자고 백화점에 가거나 TV를 켜거나 전화를 걸어도, 집에 돌아가 작업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더라도, 하다 못해 머리를 식히자고 온라인 게임에 접속을 해도 이 넘쳐나는 문화, 이미지의 홍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1990년대 이후 가히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할 문화 산업은 기존의 고전적 문화 범주로는 쉽게 포괄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상품들을 쏟아내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영상 문화는 문화 산업의 선두에 서서 그 절대적인 세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광고·영화·애니매이션·게임·캐릭터 상품 등의 산업 체계가 거대 규모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얼핏보면 문화와는 아무 관련도 없이 보이는 여타의 산업들조차 '영상 매체'의 엄청난 위력에 기대지 않고는 존립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문화 담론들 또한 도처에 넘쳐나고 있다. 오늘날 문화는 마치「쥬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무지막지한 덩치의 생물들처럼 어느 골목을 가나 지키고 서서 그에 맞닥뜨리는 우리를 새로운 혼돈의 도가니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무엇을 볼 것이냐,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어떠한 문화를 누릴 것이냐의 문제와 직결되며, 그것은 곧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하는 질문에 다름 아니다. 선택이 곧 생존인 것이다. 이 문화라는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 것인가?
중국 신화를 읽음으로서 우리는 넘쳐나는 이미지들 속에서 보다 바람직한 선택을 위한 유리한 조건을 누릴 수 있다. 매스 미디어의 놀라운 발달에 힘입어 급속하게 성장하는 문화 산업의 전면에서 우리는 오늘날 신화의 귀환을 목도한다. 신화는 영상 문화가 포함하는 많은 이미지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미지들이 그로부터 변형되고 발전되고 재해석되면서 되살아나고 있다. 바야흐로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범람하는 신화 이미지들 속에 부유하기만 할 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궁구하지 못한다.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무국적(無國籍)적인 문화에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대부분의 문화는 서구의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식·주를 비롯해서 우리들의 정신이나 신화적인 이미지조차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 고유의 맥락과 유리된 채로 우리에게 이식된 것이기 때문에 서구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무국적적인 것이다. 반쪽의, 그나마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무국적적 이미지에 의존하여 우리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엇에 근거하여 선택할 것인가? 무국적 문화의 소유자는 선택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는 기호(嗜好)에 의존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좋아할 수는 없다. 무국적의 결손된 문화적 토양에서는 자기의 문화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 신화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나머지 반쪽의 문화적 기반을 갖출 수가 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을 위한 보다 충분한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 pp. 276 ~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