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실재에 대면하여 숨을 가누기 힘든 그런 경험을 추구한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상한 존재임을, 곧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절정임을 믿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최종적인 권위자 곧 궁극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줄 경험을 갈망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연한 영화 '터미네이터'(Terminator)의 강조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이런 장르의 많은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사이보그)과 창조자(인간) 사이의 투쟁이 등장한다. 이 영화가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만든 로봇이나 어떤 기계가 우리를 능가하여 우리를 패배시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기계는 당연히 시키는 대로 우리를 수종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런데 거꾸로 어떤 기계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섬기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상상하노라면 불안해진다. 정상적인 질서가 뒤집힌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불안감을 공상 과학 영화 제작자와 소설가들이 이용하는 것이다. '터미네이터'에서는, 사이보그가 계속해서 되살아난다. 그것이 파멸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어김없이 불길 속에서 다시 살아나서 인간들을 계속 처치한다. 영화 제작자가 관객을 희롱하는 것이다. 만약 기계-인간의 피조물-가 그 창조자보다 더 위대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이런 유의 책이나 영화에서는 늘 결국 인간이 승리한다. 그와 다른 결말은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고 또 들려주어 피조물이 결코 그 창조자를 누르고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킨다. 이것은 우리 인간을 만든 창조주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
그랜드 캐년, 무럼비지 강, 블루마운틴에서 지는 황혼, 마가렛 강의 입구, 그레이트 베리에 리프(Great Barrier Reef)와 같은 경관을 볼 때 왜 우리는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우리가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놀라운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다.
--- pp 70
우리가 다른 이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시키는 강한 사회적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을 객체화시키는 문화 풍조다.
위대한 유대인 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우리 마음 속에 사람을 각가 주제와 객체로 취급하도록 나누는 선이 있다고 말했다. 객체라는 말의 의미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에게 얼마나 쓸모있는 존재인지의 정도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특정한 용도로 생명없는 사물을 많이 다루다 보면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대하기 쉽다. 타인을 주체로 본다는 것은 그들도 적어도 우리 자신만큼이나 복합적인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를 '구닥다리 노인네' 혹은 '멍청한 금발'이라고 딱지를 붙인다면 상대방을 객체화하는 셈이다. 번쩍거리는 외제 자동차에 눈길이 갔다가도 운전자가 촌스런 모자를 쓴 노인임을 보고는 쓴웃음을 짓는다면 상대방을 우리와 똑같이 고귀한 인격을 가진 주체적 존재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지배당할 때의 이야기다. 한 힌두교도 남자가 영국의 고위 장교가 살던 호화 주택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장교의 부인이 오이 샌드위치와 진토닉을 마련하고 고위층 귀부인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열 참이었는데 청소부가 그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현관 앞의 자갈이 깔린 순환 차도에는 나뭇잎이 널려 있었고 계단도 지저분했다. 손님들이 도착할 때가 가까워지자 그 부인은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때 청소부가 등나무 빗자루를 들고 현관 쪽으로 뛰어왔다. 부인은 당장 총알같이 일을 끝내라고 소리지르고는 다시는 일하러 오지 말라고 했다. 총소부는 그 자리에서 파면당한 것이다.
그 힌두교도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히고는 깊이 사과했다. 그 전날 밤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힌두교식 절차에 따라 조치를 취하느라고 늦었다는 것이다. 그 부인은 난생 처음으로 이 남자에게도 가족이 있고 자기처럼 고통과 기쁜, 승리와 비극을 느낄 줄 아는 인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한갓 청소부에 불과했다. 그저 유용한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뇌성마비 장애인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무시한다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통해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실 수 있는 여지를 제한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새로 이민 온 사람들을 우습게 여긴다면(그들의 언어도 못 알아듣고 굳이 관계를 맺을 필요도 없다고 해서) 그 역시 하나님의 계시를 제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주체로 생각하고 자신을 많이 개방할수록 하나님께 나를 더욱 개방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오직 나의 필요에 의해서만 인간 관계를 맺고 타인을 독특한 존재 즉 주체로 보지 않는다면, 그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혹은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목적으로.
--- pp 150~152
내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카바나(kavanab)'라고 불리는 영적 훈련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용어로서 선재 의식(premeditation) 정도로 번역할 수 있으나 이보다 더 풍부하고 싶은 뉘앙스를 갖고 있는 말이다. 카바나 훈련은 모든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지향성으로 완성될 수 있음을 보는 훈련이다. 마르틴 부버와 아브라함 헤셸과 같은 유대인 신비주의자와 신학자들은 카바나가 일상중에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 사상가들은 사고의 세계와 행동의 세계를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전자를 후자의 표출로 보고 또한 그 역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우리는 영성, 묵상, 기도, 예배와 같은 내면의 세계를 행동으로 구성된 외적 세계와 분리시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카바나 훈련을 받은 이들은 참된 인생의 의미가 행위로 표현된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각 행위가 신성함-즉 하나님 지향적인 취지-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가장 평범한 비종교적 활동도 하나님을 지향하는 취지를 담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르틴 부버는 이렇게 말했다.
- 에녹은 구두수선공이었는데, 가죽의 위쪽과 아래쪽을 바늘로 한 땀 한땀 꿰맬 때마다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였다...인간은 영원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데, 어떤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일을 할 때 마음에 품은 의도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을 거룩하게 바치는 것에 관한 가르침이다.
카바나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점을 깨달아야 한다. 즉 행위는 거룩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아무런 목표 없이 경솔하게 하는 행위도 모두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다. 평범한 행위도 거룩하게 승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두 수선공 에녹처럼 가죽을 꿰매는 것도 거룩한 행위가 될 수 있다. 이어서 부버는 이렇게 말한다.
- 이 말은 새로운 활동에 손을 대라는 것, 곧 표방하는 목적으로 인해 활동 자체가 신성하거나 신비롭게 될 그런 활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정한 일, 곧 일상 생활에 속하는 평범한 일을 하되 그 일의 의도와 그 진정한 의미에 걸맞게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일은 마치 조개껍데기와 같다. 자기 일을 거룩하게 승화시키면서 제대로 마무리하는 사람은 그 핵심에 있는 무한을 포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명백히 신비롭고 거룩한 활동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평이한 활동도 거룩하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 pp 190~193